한국일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2017-07-01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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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암전문의로 일한 70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암에 안 걸리는 법’을 물었더니 그는 ‘암을 피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암에 안 걸리는 법은 아직 없다는 말이다.

첫째는 먹는 것. 건강한 식생활이다. 그는 포화지방이 가장 나쁘다며 되도록 붉은 고기와 유제품을 먹지 말라고 했다. 둘째는 삶의 태도. 밝고 즐겁게, 긍정적 시각으로 살라는 것이다. 매사 부정적으로 보며 우울하게 살면 몸의 면역시스템이 작동되지 못한다고 했다.


고해(苦海)에 비유되는 인생에서 힘든 일, 괴로운 일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맞아야할 손님들. 그 손님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삶의 태도이다. 그들이 몰고 오는 고통과 슬픔, 스트레스에 짓눌리지 않고 훌훌 털어내는 긍정적 자세가 필요한데,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조력자이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며 삶의 굽이굽이에서 응원해주는 존재가 있으면 삶은 훨씬 견딜 만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종종 친구이다.

‘친구’가 심리학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과 행복의 비결이라는 사실은 많은 연구결과 확인되었지만 이때 대상은 주로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친구 관계가 어쩌면 가족과의 관계보다 우리 삶의 질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사람의 일생에 친구가 미치는 영향을 주목하며 심리학자 칼린 플로라는 ‘Friendfluence‘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번 주 근 40년 친구들의 특별한 전통이 화제가 되었다. 샌타바바라 고교를 같이 다닌 친구 5명이 매 5년마다 같은 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같은 포즈로 사진 찍기를 35년이나 계속했다. 이번으로 총 8번의 휴가 동안 19살 싱그러운 청년들은 50대 중반의 배 불룩한 아저씨들로 바뀌었지만 늙지도 변치도 않은 것은 우정. 네 일을 내 일처럼 함께 하며 살아왔으니 서로가 서로의 분신 같이 가까운 존재들이 되었다.

지인 중에도 친구들과의 우정이 특별한 분이 있다. 남가주의 60대 주부 김혜영 씨는 대학친구 8명과 말 그대로 ‘같이’ 살아왔다. 미국에 2명, 한국에 6명이 살고 있는데 이들 친구 사이에 거리는 의미가 없다. 수시로 전화를 하며 속내를 털어놓고, 몇 해에 한번씩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같이 어울리며 가깝게 지낸다. 거대한 한 가족이다.

한국에 사는 친구의 아이가 미국에 오면 이곳의 친구가 집에 데리고 있으며 보살피고, 미국에 사는 친구의 아이가 한국에 가면 한국의 친구들이 보살펴준다. 몇 년 전 김 씨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한 친구가 한국에서 1년 동안 매일 위로 전화를 해주기도 했다.

“수십년 같이 지낸 친구들이니 속속들이 다 알지요. 가족들에게 못하는 이야기들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아요. (친구들에게) 속에 뭉쳐 있던 것들을 털어놓고 나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시원하고, 엔돌핀이 마구 솟아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회복하고 즐겁게 살면 앞의 의사가 말했듯 암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친구의 힘이다.

친구와 건강/행복의 상관관계를 특히 주목한 학자는 미시건 주립대학 심리학과의 윌리엄 찹픽 교수이다. 100개국 남녀 27만명(15세~99세)을 대상으로 수집한 자료를 분석한 연구, 그리고 미국의 노인들(평균 연령 68세) 7,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등 2개의 연구결과를 그는 최근 발표했다. 결론은 두 가지이다. 첫째 나이와 상관없이 가족/친구 관계가 좋은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 둘째 노년의 행복감과 건강에는 친구가 가족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친구가 건강과 행복의 열쇠라는 말이다.

왜 그럴까? 친구는 선택의 대상이지만 가족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한 이유가 된다. 친구는 내가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안 만날 수 있지만 가족은 그럴 수가 없다. 책임감 의무감 등 정서적, 재정적 요인들이 얽혀있어서 가족은 행복의 근원인 동시에 스트레스의 근원이다. 가장 큰 기쁨과 가장 큰 아픔을 우리는 가족에게서 받는다. 반면 친구는 아무런 구속 없는 편안한 존재. 삶의 모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친구를 만난다.

삶의 중간 중간, 돌 뿌리에 채여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뎌 벼랑 밑으로 떨어지거나 할 때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우리는 다시 일어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노년에 맞는 고통으로 돈 없고(貧苦), 병들고(病苦), 외롭고(孤獨苦), 할 일 없고(無爲苦)의 4고(苦)가 꼽힌다. 좋은 친구 하나 있으면 여러 고통이 덜어진다. 하지만 그런 막역지우는 단시간에 얻어질 수 없는 것. 은퇴자금 보다 먼저 투자해야 할 것이 ‘친구’이다. 세월을 뛰어 넘는 오랜 친구는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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