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자신이 ‘수구주의자’ 라든지 ‘보수주의자’ 라고 크게 내세웠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대부분은 자신을 “개혁주의자” 이라든지 “진보주의자” 라고 평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아 보인다.
대통령들 중에는 자신의 임기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이한 명칭을 붙히는 경우도 있는데 Theodore Roosevelt 의 “Square Deal,” John F. Kennedy 의 “New Frontier,” Lyndon B. Johnson 의 “The Great Society” 등이 그런 예들이다. 더러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발언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Donald Trump 대통령마저 우리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창조경제 수준급의 주장인 “America First!” 를 강변하고 있는데 그 주장을 듣고 식상한 독일의 Der Spiegel 지는 “그러면 The World Last! 라는 말이냐?” 라고 얼마 전에 비아냥 거렸다.
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마 모든 사람들은 “New Deal” 이라는 구절을 연상 하리라 짐작되지만 그 New Deal 혹은 “뉴딜정책” 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 하는 지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 이다. New Deal 이 무엇이었던지를 다 설명하자면 책이 몇 권이 필요할 것인 까닭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New Deal 정책이란 미국의 대공황 탈출을 위해서 FDR 이 입법한 New Deal 이란 법에 따라서 질서정연하게 집행된 정책 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시리라고 짐작된다. 근본적으로는 과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New Deal 법” 이라는 것은 없었지만 정부가 공평하게 Dealer 노릇을 할 수 있게 만든 수십 개의 법들이 있었고 대공황을 졸업한 후에도 미국을 근본적으로 많이 개혁해낸 정책들이 New Deal 에 포함된다.
흔히들 FDR 을 “과격한 개혁주의자” 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FDR 은 자신을 “보수주의자” 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며 실제로 1932년 대통령선거 때에는 FDR 이 “충분한 과단성이 없다” 라던가 취임 초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하다” 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고도 한다.
요즘 한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비상식을 상식화하고 비정상을 정상화 하겠다” 는 “과격적”인 발언을 했다고 해서 “소통이 않되고 협치가 불가능한 독재자” 라고 혹평들을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을런지.
집행이 된지 이미 8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 정책들의 효과를 분석해 보면 New Deal 정책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거의 모든 정책들이 “새로운,” “상식적”인, “합리적”인 것들이 었다는 것이다. 정말 새로웠다기 보다는 구태의연을 벗어난 것들이었다. 대부분이 “왜 우리가 여태 그 간단한 생각을 못했었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성격의 정책들이 었지만 FDR 의 설득력, 영도력에다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건 과감 함이 가미되자 개별적으로는 별 것들이 아닌 감초, 대추, 생강, 약초들이 효과 만점의 묘약으로 조제된 것이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위기가 최정점에 도달한 1933년 3월 4일에 FDR 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미국민들은 기대 속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국회도 대통령이 요구하는 어느 법이라도 통과시켜 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취임하자 곧 특별회기로 국회를 소집하였다.
1. 긴급은행규제
우리 옛 말 중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라는 농담이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한탄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나서 반 한탄, 반 자탄조로 하는 얘기이다. 만일 어느 경제체제에서나, 특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평생 소원이었던 집을 사기 위해서, 노년의 안식을 위해서 모아 두었던 예금이 하룻밤 사이에 은행의 파산으로 날라가 버렸다면 아마 더 심한 말이 나왔을 것이다.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 되면서부터 매년 수백, 수천의 은행들이 파산되기 시작하였고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비극이 미 전역에서 일어났다. 은행이 파산되는 것을 보면서 저금통장만 꽉 움켜쥐고 앉아있을 바보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소식이 들리자마자 은행에 뛰어가서 예금을 찾으려 들 것인데 은행에 가봤더니 다섯 블럭이나 줄이 서 있고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이미 은행은 현금이 동이나서 문을 아예 닫아 버렸다. FDR 이 해결 해야 했던 가장 급한 일이 은행의 신용을 회복하고 은행업무를 계속 하도록 해야하는 것이었다.
3월 9일에 소집된 국회에 FDR 은 전국의 은행들의 휴업을 명령하는 긴급은행 규제법을 제안하였는데 시간이 없어서 법안을 인쇄도 하지 못한 채로 야당인 공화당 원내총무가 법안을 낭독하였다. “집에 불이 났는데 대통령은 이 방법으로 불을 끄자고 합니다” 라고 말하자 법안은 40분 만에 하원을 통과하였다. 하원으로 부터 받은 법안을 상원도 곧 통과시켜서 그날 저녁 8시30분에 FDR 은 은행법에 서명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법안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속도로 입법이 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모든 은행을 휴업 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재무장관이 감사를 끝낸 다음에 다시 개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었는데 국민들에게 은행의 신용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었다.
은행의 대출과 투자를 통제하는등 은행 고객보호를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 했었다. 3월 12일에 FDR 은 그의 유명한 첫 Fireside Chatting 을 radio 로 내보내면서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써 법의 취지를 설명하고 은행들 80%는 건전하다고 얘기하였다.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50만통의 격려편지를 FDR 에게 보냈다고 한다. 한달 안에 예금 10억 달러가 은행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그해 여름까지 전국 은행 4분의3이 재개업 하였으며 은행업무도 94% 가 회복 되었다. 그후 3개월 안에 추가로 은행 개혁법들이 입법되었는데 이때에 예금자당 5천 달러까지 예금을 보장해주는 FDIC (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제도도 생겨서 거의 모든 은행이 이 제도에 참여하도록 되었고 저축구좌의 보호도 강화되었다.
금융감독 기관인 FRB 의 권한도 대폭 확대되었다. 국회에서는 은행을 정부가 소유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나 FDR 은 정부의 감독권한이 확대하면 된다면서 반대 하였다. 이 은행규제는 위기를 신속하고 과감하게 처리한 좋은 사례이었다.
2. 금본위 화폐제도의 개정
경기불황으로 상업과 생산활동이 줄어들자 기업체들은 직원을 감원하였고 실직한 사람들의 소비가 줄어들자 기업활동도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자리들이 줄어들자 실직자들 간에 경쟁이 붙어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하락하기 시작 하였다. 물가와 임금이 동시에 떨어지는 Deflation 과 높은 실직률이 겹치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물가가 떨어지고 있는 데도 돈은 얼어 붙은 채로 돌지를 않아 통화량이 모자라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FDR 은 화살 한 개로 꿩 두 마리를 잡아야 하는 사냥꾼같은 재주가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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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