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먼 증오의 시대

2017-06-17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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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주된 힘으로 사랑과 두려움이 꼽힌다. 사랑은 모든 역경을 극복할 힘을 주고, 두려움은 위험상황을 피함으로써 살아남게 한다. 맹수와 독충 우글거리는 원시 환경에서 인류의 조상들이 체득한 적응의 산물이라고 진화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체구 작고 힘없는 인간은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고, 두려움으로 방어를 하면서 살아남았다.

그 다음 원초적 힘으로 분노가 꼽힌다.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기보호 본능으로 표출되는 것이 분노이다. 위협적인 상대나 상황에 분노함으로써 대적할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온 종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분노와 두려움, 사랑은 자연스럽다. 본능이다.

삶은 어쩌면 이들 본능적 감정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감정의 표출 방향과 정도가 잘못됨으로써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다. 방향 잃은 눈먼 사랑이 고통의 근원이 되고, 눈먼 분노가 자신과 가족, 이웃의 삶을 파괴한다.


지난 14일 워싱턴 D.C. 근교, 버지니아의 야구장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겨냥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스티브 스컬리스 연방하원 공화당 원내총무가 중상을 입었고, 의회 경관 등 3명이 부상했다. 일리노이 시골 출신의 범인 제임스 호지킨슨(66)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버지니아텍 사건이나 샌디훅 초등학교 사건 등 대부분의 대량살상 사건들은 정신질환과 총기의 문제로 주목 받았다.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정신질환 그리고 너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총기가 서로 만나면서 미국 특유의 비극이 반복되었다. 범인들은 뒤틀리고 확대된 분노와 증오로 고통 받다가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자폭한 경향이 강했다.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 때로는 어린아이들이 억울하게 동반 희생되었다.

이번 사건은 범인이 테러 대상을 특정했다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그는 3개월 전 고향을 떠나 차에서 노숙하며 야구장 인근에 머물렀다고 한다. 의원들이 자선기금 모금 친선경기를 위해 주 3일 아침마다 연습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언제 범행을 결심했는지는 모르지만 필시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연방의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자신이 살아남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생명 걸고 결정한 행동의 동기가 정치적 분노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개인적 원한 전혀 없고,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단지 공화당 의원이라는 이유로 공격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이견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진보적 정치인 버니 샌더스 연방상원의원을 열렬히 지지한 그는 트럼프와 공화당을 혐오했다. ‘트럼프는 반역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 트럼프와 공화당을 끝내야 한다’는 내용의 글들을 페이스북에 수없이 올렸다. 불만과 분노, 증오가 깊었다.

60대 중반 노년에 그의 인생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충동적 폭력적이어서 이런 저런 사건들에 연루되었고,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자기 세계에만 갇혀 사는 그에게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삶에 실패한 개인적 좌절감을 그는 정치적 분노로 표출했던 것 같다.

이번 총격사건은 지금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와 무관하지 않다. 호지킨슨은 정치적 반목 깊은 이 사회의 한 산물일 수 있다. 민주 대 공화, 친 트럼프 대 반 트럼프, 진보 대 보수로 갈라져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 사회적 일상이 되었다.


퓨 리서치가 지난 25년 매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 지금처럼 당파적 분열의 골이 깊었던 적이 없다. 과거에는 서로 지지하는 당은 달라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상대 당이 ‘대단히 못 마땅하다’는 사람이 민주 공화 양측 모두 과반수에 달한다.

인종적 편견보다 심한 것이 당파적 편견이어서 당이 다르면 사위·며느리로도 삼지 않겠다는 분위기이다. 공화당(민주당) 지지자 중 민주당(공화당) 사위·며느리를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1960년 5%(4%)였던 것이 2010년에는 50%(33%)로 늘었다.

한국의 ‘촛불’ 시위대가 ‘태극기’ 시위대를 원수처럼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노골적이고, 노골적일수록 같은 그룹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을 받는다.

전설 속의 머리 둘 달린 새를 떠올린다. 한 몸을 가진 머리들이 서로를 미워했다. 어느 날 머리 A가 독초를 먹고 배탈이 났는데 가만 보니 머리 B도 고통을 받았다. 상대를 괴롭힐 마음에 머리 A는 독초를 먹고 또 먹었다. 새는 죽었다.

정치적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바른 통로로 바르게 표출할 때 정당하다. 눈먼 증오의 시대에 제2의 호지킨슨이 등장할까 두렵다. 각자 자신의 정치적 편견부터 돌아보자.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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