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57)미국의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

2017-05-19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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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빈부의 격차와 부의 편재

필자가 어렸을적 한국에서는 사진이란 특별한날 사진관에 가서 박는 귀한 것이었다. 그시절 유행했던 한가지 풍습은 돐이되면 사내아이들은 사진관에 가서 고추를 다 들어낸채 나체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이 귀” 사진은 시간이 갈수록 상품으로써의 가격은 떨어지지만 차츰 늙어가는 사진속의 미남에게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가격과 가치가 동 떨어진 것들이 병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대공황 초기에 시작된 주식가격의 하락이란 것도 어느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꼭 놀라 자빠지기만할 일도 아니다. 투기꾼들이 놀음을 하다가 한쪽은 횡재를 했고 다른 쪽은 빈털털이가 되었고, 전체 투자가격이 하락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미국경제의 가치까지 같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실물경제는 여전했었다. 자동차 공장이 그대로 있었고 차 만드는 기술도 없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자원도 그대로 있었고 인력자원도 여전했다. 미국은 여전히 투자하기에 좋은 나라이었다. Hoover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경제의 기본”은 증권시장 붕괴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너무 호들갑스러울 필요가 없던 일이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경제는 구조적 부조리로 곪아오고 있었던 까닭에 상처를 수술칼로 째고 고름을 긁어내야만 하는 지경에 와 있었던 까닭이다. 노동착취라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Harding 과 Coolidge 두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에 거침없이 작동했다. 1920년대에 미국의 생산성은 꾸준히 향상 되었지만 노동임금의 인상은 훨씬 뒤쳐져 있었다. 기업들과 부자들만 막대한 치부를 하여서 부의 편재가 더욱 심해졌다.

1929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부자 3만6천가족들의 연수입 총계가 년수입 1,500불 이하를 버는 1천2백만 가족의 년수입 총계보다 더 많았었다고 한다. 당시에 가족당 필수적인 최저 생활비가 년 2천불이었던 까닭에 일반 노동자들은 저축할 수 있는 돈이 전혀 없었었고 외상거래를 더 늘릴 여력도 없어서 미국의 경제는 부자들과 기업들의 지출과 재투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증권시장 붕괴가 시작되자 부자들과 기업들이 지레 겁을 먹고 지출이나 재투자를 대폭 감소하였는데 그 감소된 액수를 보충해줄 다른 재원이 없었던 까닭에 기업들의 매상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라디오, 냉장고 등이 팔리지 않기 시작하였고 다른 공장들에도 팔리지 않은 재고품들이 쌓이기 시작하자 공장들은 직원들을 해고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이때쯤 미국의 경제에 국제무역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중에 연합국들이 미국에 졌던 채무를 그 나라들이 독일에서 받는 전비보상금을 받아서 조금씩 미국에 갚았다. 패전후에 경제가 어려웠던 독일은 미국에서 대부를 받아 전비보상금으로 지불 하였는데 1930년경 부터 미국의 대출이 줄어들자 독일도 전비보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연합국들도 미국에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이 연합국들 에게도 대부를 할 수 없게 되고 미국의 수입관세까지 올라가자 국제무역이 대폭 줄어 들었다. 수출의 감소는 기업들의 불황을 초래하였고 공장들의 직원해고를 가속시켰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의 기업 합병규제가 완화되자 지주회사(Holding Company) 들이 급속히 생겨났다. 지주회사들은 자회사들의 주식 과반수를 소유함 으로써 자회사들을 관리하여 기업간의 자유경쟁을 감소시키고 미국의 경제가 소수의 재벌회사들이 더 쉽게 조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합병규제의 완화는 Investment Trust 가 양산 되도록 하였다. 회사의 자산은 다른 회사의 주식들뿐인 Investment Trust 는 자사의 주식을 증권시장에 파는 회사이다. 지주회사들과 Investment Trust 들은 자회사들의 성쇠에 사운이 걸려있는 것으로써 증권시장의 흥망은 이회사들의 성쇠와 직결 되었고 때로는 그들이 증권가격의 하락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1930년대초 까지의 미국 증권시장과 거래제도의 취약때문에 투기적인 증권투자가 쉬웠고 횡행하고 있었다. 실물경제의 성장이나 축소는 일반국민들이 감지하기도 어려웠었고 시간도 걸리는 것이었지만 증권시장의 등락은 전국민이 매일 보며 피부로 느끼는 것으로써 증권 가격의 하락은 실물경제 가치가 축소되는 증거라고 오해되기가 쉬웠었다.

증권시장의 붕괴가 대공황으로 까지 이르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Hoover 정권의 부적절한 경제대책이 대공황이 더 빨리 오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대재벌이기도 하였던 당시의 재무장관 Andrew Mellon 은 정부가 대공황을 방지하겠다고 개입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경제가 자연히 노동자를 도태시키거나, 증권값이 하락되거나, 농민들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동산가격이 폭락하더라도 정부가 개입하여서는안 된다. 그런 사태들은 자본주의하에서 불유능한 부문을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자연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Hoover 는 근본적인 치료가 없는 상투적인 미봉책으로 대처해 보고자 하였다. 그는
주, 시정부와 자선단체들에게 빈민구제를 하라고 당부하였고 기업주들과 노동 지도자 들을 백악관에 불러서 노동자 해임을 하지말고 임금수준을 계속 유지하라고 요청하였 으며 비용절감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하여 대통령의 연봉을 자진해서 20% 인하 하였다.

Hoover 는 소비가 증대 되도록 하기 위하여 1929년 11월에 전국민의 소득세를 인하 하도록 국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애당초 내는 세금이 많지않아 세금의 인하는 소비증대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다른 한편 감세혜택을 받은 부유층들은 크게 감소된 세금을 소비하거나 투자를 하지 않고 모두 저축을 해버려서 소비나 투자가 전혀 증대되지 않았고 국가 세입만 줄어 들었다.

요즘 Trump 대통령이 또 들먹거리는 소득세 감소와 유산세 폐지등은 공화당 정권 때마다 제안되는 것으로써 국민들은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그들이 내세웠던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Hoover 는 방직업계와 기타 몇 가지의 산업보호를 목적으로 1930년에 몇 종목의 수입관세 인상을 국회에 요청하였다. 국회는 대통령이 요청 하지도 않은 천여 개의 종목에 대한 수입관세 인상법을 통과시켰다. 시기적으로 합당 하지않은 관세인상법을 Hoover 는 veto 했었어야 옳은 일이었지만 그는 법안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수입관세 인상법이 집행되면서 17개월 만에 미국의 수출과 수입량은 절반으로 줄어 들었다. 국제무역이 줄어들자 무역거래를 위해서 외국의 은행들이 미국의 은행에 입금시켜 왔었던 많은 자금을 1930년에 환수해 가버려 미국의 자금은 더 고갈되었다.

과잉생산에 따르는 농산물가격의 하락으로 계속 불황을 겪어온 농민들이 전반적인 경기불황에 더욱 타격을 받아 장기대부금들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농업지역에 있는 은행들이 예금자들이 인출하는 예금을 내어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회사들이 도산해가는 것을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예금주들이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 예금을 인출하려고 하자 파산을 하는 은행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일시적인 은행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Federal Reserve Act of 1913 을 제정하였는데 대공황 초기에 일어나기 시작한 은행파산의 규모는 FRB 제도 만으로써는 막아낼 수 없는 규모가 되었다. 1929년에 642개의 은행들이 파산하였고 다음해에는 그 두 배의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1931년에 파산한 2,298개의 은행들과 함께 예금액 16억불이 증발하여 버렸다. 집을 사기 위하여, 자녀의 교육을 위하여 오랫동안 뫃아온 자금과 노년기의 생활을 위해 평생을 저축해온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일푼이 되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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