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가는 거 상관하지 말자고 마음 먹었더니 정말 세월 빨리 간다. 벌써 부활절이 지났다. 올해도 삼분의 일이 간 셈이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살아보니 세월은 모든 걸 해결한다. 챙피했던 것도, 상처받았던 것도 억울했던 것도 다 세월이 지나면 아문다. 세월이 흐르면 다 포용할수 있긴 하지만 그러나 당하는 그 당장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건지 누구래도 붙잡고 묻고 싶은 순간이 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면서도 그랬다. 비행기에 올라 내 좌석이라고 앉았는데 느닷없이 내리라고 강요하더니 거절하자 주먹으로 콧등을 깨고 이를 부러뜨리고 피투성이로 통로를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입장이 되었다면. 범법자도 아니고 불법으로 탑승한 것도 아닌 터에 그 경우를 당했다면 얼마나 분하고 챙피하고 억울했을까. 또 만약 내가 그런 과정을 거쳐 비워진 자리에 앉게 된 입장이라면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놀란 승객들의 경악에 찬 눈초리를 받아내며 그 자리에 다가가 앉는다는 게 얼마나 불편했을까. 또 만약 내가 그 자리의 바로 옆 좌석에 앉아 있었다면 그 일이 벌어지는 그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렇게 끌려 나간 사람의 자리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옆에 앉을 때 이유없는 적개심이 들지 않았을까?
살다보면 별별 일이 다 일어날수 있는 거라지만 세상은 정말 너무 많은 폭력에 만연되어 있다. 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다해도 우선 수치감을 느낀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안경이 부러져 나가고 뱃살이 다 들어난 채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는 모습의 사진이 온 세상에 돌아 다니는데 행여 그게 아무리 정의를 위한 순교자의 행위였다 해도 챙피한 건 챙피한 거다.
얼마 전 친구들과 밥먹으러 갔는데 웬일인지 친구가 아무 이유없이 훌떡 자빠졌다. 하도 쉽게 넘어져 우린 막 얼버무리며 꽃잎 떨어지듯 우아하게 넘어졌어, 하고 웃고 떠들었지만 실은 친구가 챙피해 하고 무안해 할까봐 일부러 연막전을 피운거였다. 폭력의 피해자도 아니고 그냥 혼자 걷다 넘어져도 그냥 챙피한 게 사람의 심리다.
어렸을 때 동네 아줌마가 누구에게 돈을 뗐다면서 챙피하다고 하는 얘기를 넘겨듣고는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 그게 왜 챙피한 걸까 이해할수가 없었다. 살다보니 챙피한 건 꼭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생기는 감정은 아닌거 였다. 챙피한 감정에 가장 예민한 때가 사춘기 때인 것 같다. 그 땐 함께 나간 엄마의 목소리가 큰게 챙피하고 여드름 난 게 챙피하고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게 챙피하다. 그래서 그 예민한 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경우 너무 챙피해 자살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말론 브란도의 영화를 보고 그에게 반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라 그의 반항아적인 역할이 근사해 보여 좋았는데 나중에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는 욕지기나게 싫고 역겨웠다. 마치 내가 성추행을 당하기라도 한듯 엄청 기분 나빴는데 얼마 전 그 영화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 때의 내 느낌이 이해가 되었다.
감독과 배역을 맡았던 말론 브란도가 짜고 성폭행 하는 장면을 실제로 했던 거란다. 상대역 여배우는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서 속수무책이었는데 그 경험 때문에 일생을 우울증과 자살미수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한다. 세상에, 예술을 위해선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무책임한 폭력도 불사한다는 거였을까? 그래놓고 그 감독은 이제와서도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니 이 험한 세상이 어찌 아니 무서울쏘냐.
폭력, 참 무섭다. 갖고 있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엔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과 함께 타인을 하나의 물건, 아무렇게나 차버려도되는 소비품으로 아는 무지한 심성이 있다. 온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이 폭력이라는 괴물을 퇴치할 방도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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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