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모자

2017-03-04 (토) 12:00:00 김희원(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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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고려시대 우탁의 시조처럼 아무리 노화를 막으려고 발버둥쳐도 자연의 순리는 거스를 수가 없다. 나날이 발전하는 화장품 기술과 개인의 노력에 따라 피부 노화는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지만, 머리의 노화는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희끗희끗해져 오는 머리에 염색하기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숱도 빠지고 머리끝도 많이 상해 있어 당분간 염색과 파마를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의 얼굴에서 머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염색과 파마를 하지 않은 모습은 정말 봐주기가 힘들었다. 평소 더위를 타는 편이라 모자 쓸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는데 할 수 없이 외출할 때에만 사용하기 위해 처음으로 모자 두 개를 샀다. 그런데, 막상 사용해 보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머리 손질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자고 일어나 머리가 제 맘대로 뻗쳐 있어도 모자 하나만 쓰면 깔끔하고 세련된 예술가로 변신한다.

그래서 항상 귀부인처럼 보이는 내 친구는 사시사철 모자를 쓰고 다니나 보다. 그녀는 일 년 내내 모자를 쓰고 다닌다. 겨울이야 추위를 막아주기도 하니까 말할 것 없지만 한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도, 실내에서도, 한밤중에도, 자기 집이 아닌 곳에서 모자를 벗는 일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외출하면서 한 번 모자를 쓰게 되면 머리카락이 납작하게 주저앉아 오히려 더 보기 흉한 모습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모자를 벗을 수가 없다.


모자 하나로 흉물스러운 모습이 세련된 멋쟁이로 탈바꿈되는 것을 보니 문득, 내 이름자 앞에도 나를 설명해줄 모자 하나 씌워 주고 싶어졌다. 미국에 와서 전업주부로 산 지 20여 년, 주부의 일도 소중한 일이라고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나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말을 늘 듣고 있지만, 이제는 내 이름 앞에 멋진 모자 하나 쓰고 당당히 세상으로 걸어나가고 싶다.

“시인이라는 말은/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이 낡은 모자를 쓰고/나는/비 오는 거리로 헤매었다.”박목월 시인은 “모일”이라는 시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시인은 비 오는 거리를 헤매야 하는 고달픈 직업임을 적고 있지만, 아이들도 다 독립하고, 생계를 책임져 줄 남편이 있는 나에게 시인이란 관사는 내 이름 앞에 씌우고 싶은 가장 갖고 싶은 모자이다.

<김희원(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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