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번 국도 62km, 해안선 120km… 경북 울진 바다여행
기성면 망양정 옛터에 새로 지은 정자. 바다 조망은 현재의 망양정보다 낫다.
때로는 은빛 파도로 잔잔하게 밀려들고, 때로는 검푸르게 넘실대다 집어삼킬 듯 바위를 때린다.
옛날 바다, 요즘 바다가 다를 리 없지만 바다를 대하는 방식은 많이 바뀌었다. 7번 국도로 남북길이 62km, 해안선 약 120km, 경북 울진은 가장 긴 구간에서 동해바다와 접하고 있다. 관동팔경에 포함된 오래된 바다 전망대가 2곳이고, 지금도 해안 곳곳에 새로운 볼거리가 들어서고 있다.
▦옛날식 바다 구경… 2개의 망양정과 월송정
망양정(望洋亭)이라는 이름에는 바다를 향한 그리움이 베어 있다. “평생에 바다 보려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 보시게나.” 조선 중기 예안(지금의 안동)현감과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낸 박선장이 망양정에 올라 읊은 시다. 높으신 양반도 바다 구경이 평생의 ‘버킷리스트’였으니, 가슴이 탁 트이는 만경창파는 최고의 감동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바다보다 짠 내 나는 일상에 찌든 뭇 백성들은 꿈꾸기도 힘든 시절 얘기다.
울진에는 망양정이 2곳이다. 지도와 내비게이션에 ‘망양정’을 입력하면 울진읍내에서 가까운 근남면 산포리 둔산에 위치한 망양정을 안내한다. 둔산은 해안에서 보면 바위절벽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얕은 구릉이다. 해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를 수도 있지만, 반대편 언덕에도 따로 주차시설이 마련돼 있다. 해안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분명 이 길을 통했으리라. 주차장에서 망양정까지 이르는 작은 봉우리엔 현재 울진대종을 세우고 해맞이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망양정은 언덕 끝자락, 바다 보기 참 좋은 자리다.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왕피천으로 갈라진 2개의 해변이 길게 이어지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솔바람을 분별하기 힘들다. 조선 숙종은 관동팔경 중 망양정의 경치가 최고라 했고, 정조와 정철도 시로 찬양한 풍경이다.
죽변항 뒤편 ‘폭풍속으로’ 촬영장. 하트 모양의 해안선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망양정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쪽으로 약 15km 내려가면 기성면 망양리다. 이곳에 지었던 정자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 후 1860년 울진현령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읍치에서 조금 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백성들이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겠지만, 망양정과 지명이 같은 망양리 주민들로선 애석한 일이었다.
그 안타까움에 2015년 본래 자리에 ‘망양정옛터’라는 팻말을 붙이고 정자를 세워 주민과 관광객의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바로 앞에 해안도로를 내 터는 좁아졌지만 덕분에 바다와는 더 가까워졌다. 기성망양해변(망양정 앞의 망양정해변과 구분해 이렇게 부른다)이 손에 잡힐 듯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전망은 현재의 망양정보다 오히려 낫다. 다만 바로 앞 전봇대와 전선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게 단점이다.
‘망양정옛터’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다시 15km 내려가면 또 하나의 관동팔경 월송정(越松亭)이 나온다. 월송정도 해변에서 가깝지만 실상 바다 전망대는 아니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울창한 송림에서 신선처럼 거닐었다는 유래처럼 바다보다는 솔숲이 운치 있는 곳이다. 입구부터 소나무 길이 이어져 바닷가임을 눈치채지 못한 정도다. 정자에 오르면 그제서야 해변과 바다가 아쉬울 만큼 보이는데, 그래서 바다색은 더 짙푸르다. 바다 자체가 목적이지만 멋스러움이 어우러진 울진의 ‘옛날 바다’ 여행지다.
▦요즘 바다 즐기기… 감성과 감각으로 만나는 바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울진에서 가장 큰 항구인 후포항 뒤편 ‘갓바위전망대’에는 신경림의 ‘동해바다-후포에서-’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찔할 정도로 바다가 코앞에 내려다 보이는 위치다.
바다는 더 이상 평생의 구경거리도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시인도 시비도 철저히 감성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먼발치에서 무심히 바라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조그만 절벽만 있어도 전망대를 만들고 감각적인 아찔함을 즐긴다. 이곳 전망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다 위에 머리만 내민 갯바위까지 걷는 길을 놓았고, 뒤편으로는 후포등대까지 테크 산책로로 연결했다. 등대 부근에 이르면 바다뿐만 아니라 후포항과 원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알록달록한 어촌 풍경도 한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일출 보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망양휴게소 전망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아찔해 절반은 입구에서 돌아선다. <최흥수 기자>
후포항에서 7번 국도로 약 26km를 거슬러 오르면 망양휴게소에 닿는다. ‘망양정옛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울진 7번 국도에서는 사실 바다를 볼 수 있는 구간이 드물다. 망양휴게소는 그 갑갑증을 한번에 풀어내듯 위아래에서 두루 바다를 훑을 수 있도록 지었다. 화장실 바다전망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날 듯하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아래로는 바닷가까지 계단이 연결돼 있고, 위로 2개 층을 더 오르면 난간 끝자락에 돌출 전망대까지 갖췄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할 정도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가 수직으로 내려다 보인다. 전망대 끝에 서면 하늘 반, 바다 반, 수평선 위아래로 푸르름만 남는다. 차문만 열면 만나는 바다에서는 힘든 여정 끝에 맛보는 감동도 아쉬움도 덜하다. 사진도 찍고 동영상으로 남기고, 이곳 바다는 충실하게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상이다.
망양정 인근 은어다리도 마찬가지다. 응봉산(999m)에서 흘러내린 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건설한 다리 양편에 은빛 찬란한 대형 은어모형이 돋보인다. 다리 인근 산책로를 걸으면 하늘을 나는 물고기가 수면에 비치고, 다리 위에서는 하천, 모래톱, 바다, 하늘을 분리하는 3개의 수평선이 단순미를 극대화한 대형 추상화를 그린다. 은어다리는 해변을 거쳐 울진친환경농업엑스포 공원과 연결된다. 이곳에는 규모는 작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또 다른 바다, 울진아쿠아리움이 있다. 대형 수족관의 웅장함 대신 아기자기한 볼거리로 채워졌다. 하루 2차례 거북이와 가오리를 비롯한 물고기가 사육사를 따라 몰려드는 ‘피딩 쇼’는 이채로운 볼거리다.
죽변에는 유행을 앞서가서 추억이 된 바다도 있다. 바로 죽변항 뒤편에 자리잡은 드라마 ‘폭풍 속으로’(2004) 세트장이다. 13년 세월에 드라마 내용도 인물도 가물가물하지만, 바다로 살짝 튀어나온 언덕 위의 작은 집은 한번쯤 살아보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세트장에서 바로 옆 죽변등대까지는 키 작은 대숲을 통과하는 ‘용의 꿈길’로 연결돼 있다. 기록에도 없는 더 옛날부터 이곳은 용이 승천한 용추곶(龍湫串)으로 불려왔다. 대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돌아보면 세트장 뒤편 바다가 부드러운 두 개의 곡선을 그린다. 해안선 모양이 마치 하트를 연상시켜 ‘하트해변’부르기도 한다. 이미지와 감성으로 찾아가는 울진의 ‘요즘 바다’여행지다.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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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