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간의 바다] Glacier Park II -산은 말한다-

2017-01-23 (월) 12:00:00 어수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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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양 옆으로 계속 따라오는 산 줄기의 주름들이 더욱 깊이를 가지는 해질녘, 캐나다의 국경에 제법 가까운 몬태나 Misoula에 이른다. 하룻 밤을 자고 일어나니 금새 눈이라도 퍼부을듯 마을은 회색 대기에 잠겨있다.

93번으로 북상하면서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닮은 산 봉우리들이 하늘로 솟구쳐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행진한다. 새하얀 설산들 자락을 따라 10월 단풍이 지천에 노랑물을 쏟아놓고 그 사이사이로 집들이 옹기종기 박혀있다. Glacier 공원 입구 Apgar 캠핑장으로 와 닿아있는 호숫가에 이르기까지 노랑물이 번져있다. 물은 잘디 잔 주름을 밀며 내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밑 바닥 자갈들이 손에 잡힐듯 더할수 없이 투명하다.

공원을 동서로 관통하는 Going to the Sun 이라 부르는 길을 간다. 구름 속으로 치솟은 봉우리들, 그 아래 넓디 넓은 Lake McDonald, 검은 구름을 뚫고 호수면 위로 수없는 은빛 화살을 쏘아대는 햇살, 이 길은 그래서 해에게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어느 위대한 작품이 이 광경을 흉내낼 수 있을까.


겨울철 보수공사로 인해 길은 중간부터 통행 불가, 하는수 없이 공원 남쪽으로 돌아 험한 골격들을 거침없이 드러낸 설산의 행렬에 압도되며 공원 동쪽으로 향한다. 아직도 몇 군데의 빙하가 산과 산 사이 수 천년의 시간을 품은채 남아 있다는,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앞으로 겨우 십여년 뒤엔 사라지고 말 Many Glacier 지역, 산과 산은 서로 기대지 않은채 저마다의 위용을 한껏 과시하며 우리 앞에 도열해 있다.

그 안으로 깊숙히 들어갈수록 그 뒤로 또 그 뒤로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깎아지른듯한 설벽들, 그리고 산이 또 산이 숨어있다 나타난다. 수천년 세월 녹아내린 물로 수많은 크고 작은 호수들을 만들어놓았다는 빙하들은 저 안쪽 어딘가에서 제 몸 녹아들어가는 시간들을 견디고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 시대에 그 최후를 맞이하리라. 10여마일 눈길을 걸어들어가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을 하고싶은 마음 간절하나 장비도 여정도 여의치않다. 대신 어느 호숫가를 걷는다. 싸락눈이 이 시월에 처연하게 흩날리며 얼굴에 따끔따끔 와 닿아 녹아내린다.

Salmon River를 따라 몇 시간을 달린다. 저 빙하의 일부분이었을 맑디맑은 강물은 넘실대며 굽이치고 강가 우거진 나무들도 노란 잎을 무수히 흔들며 같이 흘러간다. 강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Glacier를 벗어나 Stanley 공원 안, 하얀 설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너른 분지를 이룬 계곡 한 가운데에서 우린 서서히 밀려오는 어둠을 맞는다.

서둘러 산들의 행렬 한 어귀를 뚫고 공원을 빠져나오다가 어느 정상에서 우린 넋을 잃는다. 발 아래 어둠 속에서도 온통 하얀 산들, 저 멀리까지 이어진 그 장엄한 봉우리들, 그 뒤로 번지는 붉디 붉은 노을, 산 아래 짙은 청색의 산 그림자, 강이 가는다란 선을 그리며 흐르는 계곡으로 어둠이 가득 내려앉을 때까지 우린 서있는다. 말은 사라지고 생각조차 멈추어 우린 신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 울림을 듣는다. 산이 있고, 강물은 흐르고, 빛과 어둠이 있고, 거기 우리가 있다. 우린 누군가의 산이고, 강이며, 바위이고, 나무이며, 바람이다, 그리고 빛이며 어둠이다. 내가 그러하듯 너 또한 내게 그러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나쁘고 좋은것이 어디 있던가. 존재함은 다만 아름답고, 오직 감사한 일일뿐, 나의 존재는 너로하여 또 너의 존재는 나로하여 그 이유를 갖는것… .

<어수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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