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37)제27대 William Howard Taft 대통령

2016-12-30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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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화당: 1909-1912)

William Howard Taft 대통령은 전임 Theodore Roosevelt, 후임 Woodrow Wilson대통령들 과 함께 3대에 걸쳐 미국의 진보와 개혁에 공로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Roosevelt 와 Wilson 이라는 거목 사이 그늘에 치어서 그의 업적만큼 정당한 평가를 못 받는 수가 많은 억울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Roosevelt 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3선 출마를 하지않겠다고 선언하고 300 파운드 짜리 거구이지만 항상 명랑한 성격을 가진 Taft 전쟁부장관을 대통령후보로 열렬히 후원 하였다. Taft 는 1908년 6월의 공화당 공천대회에서 1차 투표로 무난히 대통령후보에 선출 되었다.

민주당은 이미 두 번이나 낙선된 경험이 있던 대웅변가 William Jennings Bryan 을 세 번째로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1908년의 총선거에서 Taft 는 국민의 투표 에서 1백만여 표를 더 받았고 선거인단의 투표에서도2대1로 압승하였지만 그것은 국민들이 공화당을 지지했던 것이라기 보다는 Roosevelt 와 그의 정책을 지지했던 까닥이라고 볼수 있었다. 실제로 민주당은 농민들과 노조들로부터 새로운 지지를 받아서 하원 의석이 늘어났으며 여러 주에서는 대통령으로는 Taft를 선출했지만 주지사로는 민주당 후보를 선출했다. 총선결과 공화당은 겨우 하원의 과반수를 유지하였다.


Taft 는 대법원재판에서 연방행정부의 변호사 역활을하는 직책인 Solicitor General 을 지냈고 연방판사를 했었다. 그는 초대 필리핀총독을 할 때에 필리핀인들의 큰 원성을 듣지않으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성취했는데, Roosevelt 대통령이 전쟁부장관으로 임명하였을 때까지 그는 한번도 선거직 공무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탁월한 행정가 이었는데 동시에 학식이 있고 성공적인 법률가였다. 그의성품이나 경험상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고 항상 언동이 계획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거구의 체격에 걸맞게 걸음걸이도 느렸는데 당면한 제반 문제에 대한 결정도 시간을 끌면서 내렸다고 한다. 결정을 내리는 절차가 재판을 하는 판사 같아서 성급히 잘못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결정을 연기하는 식이었다.

그는 개혁주의자들이 추진하던 여러 가지의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제반개혁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많았으며 , 현명한 입법은 판사가 재판을 할 때처럼 장기의 연구 끝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듯 하다. 그는 투표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무책임한 정략적인 발언을 하는 정치인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Taft 의 이러한 지나친 조심스러움은 Theodore Roosevelt 의 과감한 정치개혁에 익숙해 왔던 진보개혁주의자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미국의 수입관세 제도는 초기부터 항상 뜨거운 감자처럼 대통령들이 다루기 힘들어 해온 정치논쟁거리이였다. 원래는 유약한 국내 생산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수입관세 제도는 점차 연방 세 수입의 중요한 세원이 되어가면서 국내 생산업자들이 크게 육성된 후에도 관세가 없어지거나 세율이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광범위한 수입품목들에 부과된 관세와 높은 관세율은 소비자물가 전체가 올라가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서수입관세인하는 매선거 때마다 각 정당들이 공약으로 내거는 항목이었다. 관세제도가 10여년이 넘도록 변경되지 않았으나 Roosevelt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운이 좋게 큰 정치논쟁이 되지 않았다.

1908년의 대통령 선거 때에 공화당은 관세제도에 대해서 중대한 개정이라는 다소 애매한 공약을 내걸었다. Taft 는 취임후 곧 관세제도개혁을 위하여 특별국회를 과감하게 소집하였다. 국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정치행보이었다. 모두들 기대했던 대로 하원은 많은 수입품목들을 관세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여러 품목들의 관세율을 낮추었다.

그러나 하원을 통과한 관세 개정안을 상원은 대폭 수정하여 거의 변화 없는 원상복귀를 시켜놓았다. “상원은 부자들의 소 club” 이란 별명답게 의결하였던 것이다. 이 개정관세법 은 분명히 선거공약을 어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Taft 는 아무 이의를 제기함 없이 서명하면서 이것이 공화당이 통과시킨 가장 좋은 관세개정 이라고 한술을 더 떴다. 많은 신문들이 사설로 관세개정이 사기라고 Taft 를 비난하였고 그를 지지해 주었던 진보주의자들은 그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Taft 가 진보주의자들의 신임을 더 잃게 만드는 일이 또 일어났다. 1909년 여름에 알래스카에 있는 연방 수유지를 J.P. Morgan 과 Daniel Guggenheim 등이 참여한 투자 group 에게 판매하는 과정에서 Gifford Pinchot 산림청장과 Richard A. Ballinger내무장관 (Secretary of the Interior)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Roosevelt 에 의해 임명된 Pinchot 는 Taft 가 임명한 Ballinger 와는 산림정책에 대한 정책적인 차이가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 알래스카 소재의 석탄 광산지 판매에 Ballinger 의 정실이 작용했다고 계속 비난하였다. Taft 는 결국 Pinchot 를 해임시켰다. 그는 Pinchot 의 해임 때문에 자연자원 보존주의자들의 신임을 잃었고 Roosevelt 의 노여움도 받게 되었다.

Roosevelt 를 노엽게 만든 일이 또 하나 더 있었다. Roosevelt 는 비합법적인 기업합병인 Trust 를 통제할 때에 “bad Trust,” “good Trust” 를 조심스레 구분해가며 bad Trust 만을 해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Taft 는 bad 나 good 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Trust 를 다 단속하려 들어서 모두 45개의 Trust 들을 기소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Roosevelt 가 조심스러운 검토 끝에 허가해 주었던 U.S. Steel Corp. 이었다.

Roosevelt 는 Taft 가 자기의 결정에 정면 도전하는 것 쯤으로 생각하고 몹시 노여워 하였다고 한다. Taft 가 이권단체의 도구가 되었다고 결론을 낸 하원의 진보주의자들은 드디어 반란세력이되어서 우선 Taft 동조자인 Joseph G. Cannon 하원의장부터 손을 보아주기로 하였다. 당시의 하원규정으로는 하원의 운영위원회는 하원의장의 임명으로 구성되며 하원의장은 운영위원장을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운영위원회는 법률안이 본회의에 상정될 것인지 보류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던 까닭에 하원의장은 거의 독재자적인 권한이 있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운영위원들을 본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하원의장은 운영위원회에 참석할 수 없도록 규정을 바꾸어 버렸다. 반란은 더 계속 되었다. Taft 가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 에게 철도회사들을 통제할 권한을 주도록 입법해 줄 것을 요청하자 하원은 1910년에 I.C.C. 가 전화, 전신, cable,.무선전신회사들까지 통제할 수 있도록 권한을 확대시켰다. 일견 행정부의 통제권한을 늘려준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행정부의 자유재량권을 줄이리기도 하는 입법들이었다.

그러나 Taft 는 Roosevelt 처럼 과단성은 없었지만 사실은 그 나름대로 재임중 진보주의적 개혁을 많이 해낸 대통령이었다. 그는 연방 공무원 직종 중 많은 직종을 직업공무원들로 채워지도록 하였고 Apalachia 산맥의 산림 1백만 에이커 이상을 자연 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으며 , 민간인들에게 판 연방 토지 속에 매장된 석탄, 석유 등의 지하자원은 연방정부가 계속 소유하도록 하였다.

소도시들에도 우편으로 소포가 배달되도록 하였고 우체국에 저축구좌를 열게 하여 제한적인 은행업무를 보도록 하였다. 소관업무의 강화를 위해서 상공노동부
(the Department of Commerce and Labor) 를 상공부와 노동부로 분리시켰다. 1912년에는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가 주로 승격되었다. 그는 연방소득세 제도를 추진하여 1913년에 연방헌법 개정 16조항으로 소득세 제도가 시작되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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