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새마을운동 이런 면도 있었다’

2016-10-26 (수) 02:28:14 황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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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미교수, UW’북소리’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

▶ “농민 자발적 참여 강해”

‘새마을운동 이런 면도 있었다’
캐나다 밴쿠버BC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UBC) 방문학자인 김영미 교수(국민대)가 지난 15일 워싱턴대학(UW) ‘북소리’ 행사에서 펼친 강연은 종전에 잘 알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의 이면과 새로운 분석으로 안내해줬다.

지난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강제적으로 밀어붙인 새ㅔ마을 운동은 그의 의도나 정치적 의미와 상관없이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힘이 됐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저자인 김 교수는 이날 이 같은 통념과 달리 “새마을운동은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성공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71년부터 1978년까지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총자원은 1조9,919억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정부가 부담한 액수는 전체의 28%인 552억원에 불과하고, 71.3%인 1조4,209억원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부담했고, 나머지 1%는 성금이나 성품으로 채워졌다. 결국 주민들이 정부 투자액보다 약 3배에 달하는 금액을 스스로 부담한 셈이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농촌 출신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농촌 주민들은 지게만 드나들 수 있도록 좁은 골목길에 수레가 들어갈 수 있도록 땅을 스스로 내놓았고, 그 일에 자신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물론 당시 쌍용양회에서 생산된 시멘트를 처리하는 방안을 강구하다 마을에 무상으로 공급하기로 했던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심화된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해소하고, 1971년 대선과 총선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입장에서 ‘마을 공동체’를 잘살게 하자는 의미로 뭉치게 됐고, 더더욱 집안에 있었던 여성들이 ‘부녀회’조직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자체적인 ‘자금’을 갖게 되면서 새마을운동이 탄력을 받게 됐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너무 강해 2000년대 이전까지는 야당이 박정희 독재의 유산으로, 여당조차도 눈치를 보면서 꺼내지 못한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김 교수는 “2011년에는 4월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지정하고, 박정희 새마을교육관 설립, 유네스코의 새마을운동 기록유산 등재 등으로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면서 “새마을운동이 주민자발적으로 진행된 데 대한 평가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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