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27)미국 내의 ‘반제국주의자들’

2016-10-21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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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날만 새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으로 부터,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요즈음엔 아랍의 이슬람 국가들도 합창으로 “제국주의 미국 타도” 라는 규탄을 억울하게, 때로는 정당하게 받아오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남이사 미국에 대해서 뭐라고 혹평을 하더라도 거의 모든 미국사람들은 “우리는 정의, 자유, 평화를 추구한 ‘청교도정신’ 으로 험한 바다를 건너와 맨손으로 척토를 개발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온 세계가 부러워 하며 바라보는 언덕 위에서 민주주의의 모범적인 빛을 등대처럼 빛내주고 있는 나라이다” 라는 것과 “미국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만 투쟁한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우선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민망하고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처럼 외국에서온 미국사람들 뿐만아니라 더러는 미국의 미국사람들 중에도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성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미국은 1800년대말에 이르러 짧은 기간 동안에 급격히 많은 해외영토 (식민지?)를 많이 취득한 나라가 되었다. 당시의 유럽 열강들처럼 무력으로 강탈한 땅들은 아니었지만 미서전쟁의 승리로 1898년에 스페인으로부터 고작 2천만 달러로 필리핀 를 횡재하였는데 필리핀 는 천개의 무인도를 포함해서 7천개의 섬으로 구성된 큰 부동산이었다.


이 무렵 미국은 Alaska (1867), Midway Islands (1867), Guam (1898), Hawaii ( 1898), 푸에르토 리코 ( 1898), Wake Island (1899), American Samoa (1899) 등의 해외영토를 전쟁을 포함한 여러가지 수단으로 획득하였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강탈들과는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미국의 새 “식민지”를 다 합하면 10만 평방마일의 부동산에 천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들 있던 규모이었다. 1870년부터1900년 사이에 아프리카 대륙을 분활하여 식민지화 함으로써 영국은 5백만 평방 마일의, 불란서는 350만 평방 마일의, 독일은 백만 평방 마일의 해외영토를 확장한 것에 비하면 미국의 해외영토는 눈꼽만한 것이었고 스페인, 러시아, 일본에도 비교할 수도 없는 규모이었다. 종국적으로 미국의 영토가 된 것은 아니지만 쿠바도 이때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부처님도 불공 거절하시는 것 봤어?” 라고 미국사람들이 대꾸하며 미국의 영토확장의 탐욕스러움을 변명을 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럴랴치면 “정의, 자유, 평등, 평화 …” 등등의 아름다운 문구와 철학이 넘치는 “독립선언문”을 애초에 쓰지 말았던가…
미국의 제국주의화를 우려하고 슬퍼하고 분개까지 했었던 “반제국주의자들”이 미국안에 있었다.

태평양 지역으로의 영토확장은 장차 일본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동양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므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미국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제국주의자들 중에는 정당, 종교, 사회계층을 초월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Samuel Gompers 노조지도자, Andrew Carnegie 철강재벌, Charles W. Eliot 하바드대학교총장, David Starr Jordan Stanford 대학교 초대총장, 철학자 William James, 사회사업가 Jane Adams, 인기소설가 Mark Twain 과 대통령후보 William Jennings Bryan 등도 포함되어 있었었다.

이들 반제국주의자들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화에 대해서 크게 비난하였다. 필리핀 의 독립투사들이 1902년 4월에 마지막으로 소탕될 때까지 미국은3년 동안 미서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과 전비를 쏟아넣어 그들을 아주 무자비하게 토벌을 하였고 이런 사실들을 언론통제로 미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일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William Taft 총독은 1900년에 필리핀의 천주교회가 소유했던 많은 땅들을 농민들에게 배분해주고 미국은 도로, 항만, 위생시설등을 개량해 주었고 그후 필리핀 는 미국의 통치아래 서서히 자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식민지화 초기에 인천 상륙작전으로 우리가 잘아는 Douglas MacArthur 원수의 부친인 Arthur MacArthur, Jr. 육군중장은 미군사령관을 1년여 지내면서 총독과 불화하여 미국으로 전출되었는데 후일 Taft 가 육군장관이 되어서 찬바람을 맞았다.

1900년의 공화당 공천대회에서 McKinley 대통령은 대통령후보로 만장일치로 다시 공천되었는데 그는 42세의 젊은 뉴욕주지사 Theodore Roosevelt (T.R. 또는 Teddy) 를 부통령후보로 지명 하였다. Theodore 는 Teddy 라는 애칭을 싫어하였으나 언론들이
애칭을 계속 써서 Teddy 로 더 자주 불리는데 지금도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곰인형 Teddy Bear 가 Teddy 대통령으로부터 따온 호칭이라고 한다.


Teddy 는 24세때에 뉴욕주 하원의원을 하면서 뉴욕시의 개혁을 위한 입법을 하는등 부통령후보가 될 때까지 여러가지의 공직을 거치면서 공화당 내에서 항상 시끄럽고 괄괄한 정치인이었다. 미국에서 부통령 은 관례적으로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지낸다고 한다. 아마 공화당원들은 Teddy 를 부통령으로 “귀양”보내놓으면 그의 시끄러운 입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 하였던 듯하다. 이 기대가 전혀 빗나갔음을 미국민들은 곧 알게 된다.

Teddy 에 대해서는 그의 대통령으로써의 치적을 얘기할 때에 자세하게 써 보고자 한다. Teddy 는 “제국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항상 소년처럼 팔팔하고 정치경쟁을 즐겼다는 Teddy 는 선거기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필리핀 식민지화를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자들을 비난하였다.

민주당은 William Jennings Bryan 을 재공천하였다. 그는 Free Silver 주의를 공약에 넣었으나 공화당 지배하의 하원은 이미 금본위제도를 채택했던 까닭에 Free Silver 는 더 이상 정치쟁점이 되지 못하였다. 막상 민주당이 정치쟁점으로 삼은 반제국주의도 시기가 이제는 늦어서 국민을 선도해가는 주장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서전쟁과 비율빈 식민화 전투 등으로 미국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순조롭게 성장되었고 그 덕택으로 경제성장을 강조해온 McKinley 는 민주당의 Bryan 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미국은 1898년에 이르러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실상의 식민지들을 소유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고 식민지들이 장차 미국에 어떤 영향을 줄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마치지도 못하고 식민지 섬나라들에 정부를 세워가면서 통치를 시작하였다.
스페인 이 쿠바 를 내어 놓음으로써 미국은 원하면 쿠바 를 영토화 하거나 식민지화 시켜 버릴수도 있었다. 종국에 미국은 쿠바 를 독립시켜주기는 하였지만 쿠바 국민들이 원하는 조건없는 독립은 아니었다.

그후 계속되는 미구과 쿠바 의 불화를 감안해보면 차라리 그때에 미국이 쿠바 를 식민지로 남겨 두었었으면 좋았었을 것이다. 코딱지 만한 쿠바와 코끼리같은 미국의 악연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이 쿠바 에 군인총독을 두고 통치하였던 1898년부터 1902년 사이에 혁명전쟁 으로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하고 교육시설과 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쿠바 의 재정을 바로 잡았고 평화속에서 새헌법이 제정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쿠바 에서 미국이 제일 먼저 해결해 주어야했던 문제는 쿠바 에 창궐하는 황열병이었다. 미국은 미육군 육군의무감실의 Walter Reed 의무소령 (미국대통령도 정기건강검진과 치료를 받는 Walter Reed 육군병원이 현재에도 Washington 에 있음) 을 단장으로한 의무조사단을 쿠바에 파견하여 황열병이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것을 알아내어서 쿠바 에서 모기들을 박멸함으로써 황열병을 근절시켰다.

미국은 미국기업들의 투자를 보호하고 쿠바 를 계속 수중에 장악하기 위해서 몇 가지 보장 없이는 철병을 하지 않기로 하고 그조건들을 쿠바 의 헌법에 넣도록 하였다. 첫째로 쿠바 는 쿠바 의 독립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조약을 외국과 맺지않을것 과 쿠바 의 영토를 외국이 획득하는 일이 없도록 할것, 미국이 증기기선용 석탄저장소나 해군기지로 쓰기 위하여 요구하는땅들을 미국에 팔거나 임대할 것, 쿠바 는 발생되는 이자를 매년의 경상예산으로 갚지 못할 정도의 부채를 지지 않을 것, 쿠바 는 생명, 재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아무 때고 미국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할것 등이었다. 쿠바 국민들은 이런 조건들에 반대 하였으나 결국은 쿠바 의 헌법에 삽입되었고 미군은 철수하였다. 이런 조건들을 골자로한 영구조약이 1903년에 채택되었다.

필자는조금전에 쿠바를 독립시켜 주지않고 식민지화 해버렸으면 아마 훗날의 악연을 맺게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쿠바 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푸에르토 리코 도 독립을 시켜줄 수 있었지만 주민들이 미국영토가 되기를 자원해서 미국의 영토 (territory) 가 되었다.

미국에는 현재 푸에르토 리코, Washington, D.C., U.S. Virgin Island, Wake Island, American Samoa 등등 16개의 territories 가 있다. Territory 마다 다른 조건들이 있음으로 territory 가 무었인지를 한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대개 앞으로 주민투표 등 몇 가지의 법적절차를 마치면 주로 승격될 수도 있는 영토로써 거의 주와 비슷하게 자치를 하는 곳도 있고 Governor 와 상원격인 Council 의원 등을 미국대통령이 임명하는 경우 등 다양한 통치방법이 쓰이고 있다.

푸에르토 리코 도 시초에는 Governor 와 푸에르토 리코 인 5명을 포함한11명의 Council 의원들을 미국대통령이 임명하였고 35명의 하원의원들은 주민들이 선출하였다. 푸에르토 리코 는 아직도 연방하원의원은 없는대신 투표권이 없는 대의원을 연방하원에 보낸다. 주민들은 병역의무는 있으나 연방소득세는 내지 않는다. 지금도 독립주의당이 활발할 정도로 독립을 원하는 주민들도 있으나 두 번의 주민투표에서 독립안은 부결되었다. 열성 독립당원들이 1948년에 트루먼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던 일도 있었다.

미국의 영토가 된후 미국은 푸에르토 리코의 위생, 교육, 도로, 농업들 이 개량시켰고 재판제도도 미국식 제도로 변경되었으며 1901년부터는 푸에르토 리코 산물들에 대한 관세가 철폐되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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