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바랜 기억

2016-09-21 (수) 06:13:46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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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복원 사업을 하는 짐 매티스는 자신에게 옛날 사진의 복원을 부탁한 사람들이 복원된 사진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이 자신의 기쁨 중 하나라고 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복원을 원하는 사진들은 너무 오래되서 바랬거나, 때가 묻었거나, 심지어는 찢어져 조각이 난 사진들이기 때문이었다. 짐이 사진을 찾으러 오는 손님의 만족함을 보면서 기뻐하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나는 어떤 것을 복원하여야 할까 생각에 잠겼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천진난만한 때의 사진을 꺼내어 들었다. 사진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그 옛날 마루에 앉아서 속옷만 입고 팔 다리에 수박씨를 붙이고 아주 큰 수박 한 쪽을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무척 탐욕스러웠고 그 수박 맛에 도취되어 보였다. 우리 부모님 눈에 수박 맛에 빠져 행복에 겨운 어린 내가 얼마나 이뻤으면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서 나이 든 이날까지 간직하게 하셨을까? 천천히 부모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보았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정말로 잊혀지지 않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뛰는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도 잠깐. 우습고 부끄럽고 창피한 일들도 이어서 생각났다. “너 아빠 해. 나 엄마 할게.” 소꿉장난을 하면서 빨간 벽돌을 으깨어 고춧가루를 만들고 있는데 꼬마 아빠가 갑자기 “나 안할래”하며 괜히 심통부렸던 일, 항상 퇴근할 때 무엇인가를 들고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앞집 친구와 함께 그 집 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서 친구의 아버지를 기다리던 일들… 그 친구아버지가 오시면 멀쑥하게 혼자 앉아 나도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일. 특히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시는 날엔 더 더욱이 그랬다. 자라면서 이런저런 바래버린 기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좋은 추억만이 아니라 기억조차 하기 싫고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 나의 저 깊은 곳에 자물쇠로 꼭꼭 굳게 잠궈버렸던 일들도 모락모락 함께 떠올랐다. 사진의 한 장면이라면 추억하기 좋게 확대하거나 그냥 찢어버릴 수도 있으련만... 만일 짐 매티스가 사진복원하는 사람이 아니고 마음을 복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의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배경, 색, 심지어는 주인공들도 밝고 이쁘게 장식하고 3D로 새로 복원하여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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