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중국의 제도를 본따 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미 고려때부터 과거제도를 쓰기 시작하였고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운영상의 허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는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로 자리가 잡혀있었다. 공정한 방법으로 “개천에서도 아직 날개가 생기지 않은 용을 찾아 내었다.”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선진적이고 모범적인 “직업공무원”시험제도 이었다고 생각 된다.
미국의 공무원 임용제도는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무제도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무제도 보다 더 나쁜 엽관제도(The Spoils System)이었다. 우리말로 엽관 은 대개 인맥 등을 이용한 ‘정실인사’를 의미하거나 금전이 개입된 ‘매관매직’을 의미하 여서 부패와 부정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의 ‘Spoils’에도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양에서는 ‘공직임명이 공로에 대한 당연한 대가’ 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함축되어 있어서 우리의 엽관이 은밀하게 행해졌던 것에 비하여 훨씬 더 공개적이고 떳떳하게 시행되어 온 제도이었다.
왕정하에서는 직위의 고저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공무원들이 왕의 뜻에 따라 임명되었지만, 세계에서 최초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행정수반이지만 매 4년마다 바뀔 수도 있는 대통령제도 하에서는 공정한 공무원의 임명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돌이켜 비교해 볼 수 있는 역사적 관례가 없는 정치제도를 시험했던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공무원 임명제도에 혼선이 있었다.
모든 공무원은 대통령이나 주지사에 의해 직.간접으로 임명되었다. 공무원들은 임기나 신분을 보장해주는 제도도 없어서 아무 때고 파면될 수 있었으며 모든 일에 임명권자에게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나 전제가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제도이었다. 엽관제도로 공직에 임명된 사람들은 공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선거때에는 선거운동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월급의 일부를 정치헌금 으로 내어 놓아야 했다.
워싱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난 후 제2대 애덤스 대통령은 취임후 대거 공무원 물갈이를 하였다. 명분은 “무능한자들을 내보내고 새 대통령의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뜻을 잘 아는 측근인사들이 공무집행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듯한 명분이었지만 정말 그랬었을까?
로마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To the victors the spoils belong” 이라는 서양의 속담처럼 애덤스 대통령도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공신들에게 갚아야할 빚이 많았을 것이고 측근 공신들을 공직에 임명함으로써 빚도 갚고 통치에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를 일일히 변명할 필요도 없었고 초기에는 그것을 강하게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바뀔 적마다 많은 공무원들의 물갈이는 전통이 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제도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엽관제도를 가장 공개적으로 주저없이 시행한 사람이 제7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었다. 그는 요즘 도널드 트럼프처럼 거친 말투를 쓰고 격렬한 대통령선거 운동을 최초로 했던 장군출신 대통령이었다. 그 당시의 공직들이 별로 전문화되어 있지 않았고 professionalism이 정립되지 않았던 때이기도 하였지만, 잭슨 대통령은 “누구나 보통 정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 공직에나 임명될 자격이 있다”라고 호언하면서 대규모의 물갈이를 했었다.
이런 전통은 그 후의 대통령들도 지켜왔으며 대통령이 우편국장, 각급 의 연방판사, 기타의 고급 공무원을 임명할 때에 추천권을 지역출신 상하원 의원들에게 줌으로써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조종하는 수단으로도 쓰여져 왔다.
이러한 엽관제도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까지 계속 되어 오다가 미국국회는 1871년에야 대통령에게 Civil Service System 을 장차 시행하기 위한 규율을 작성하도록 요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당시의 Grant 대통령은 직업공무원제도의 연구를 위해 특별위원회를 임명하였으나 엽관제도의 존속이 정치적으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상원의 공화당계 수구파 의원들의 방해로 특별위원회는 제대로 활동할 수 조차 없었다. Grant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말에 그의 각료까지 포함된 고급 공무원들의 부정사건 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많이 잃고 있어서 직업공무원 제도를 더 추진하지 못한 채로 임기를 끝내었다.
1876년의 대통령선거로 Grant 대통령을 승계한 Rutherford B. Hayes 대통령은 정치적 수완은 없는 사람이었으나 강직한 사람으로 오하이오 주지사 재임기간에 직업공무원제도를 오하이오 주에 도입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1876년 대통령선거 때의 개표과정의 난맥으로 대통령 재임 기간내내 그는 “대통령각하” 라는 호칭대신 “사기꾼각하” 라고 조롱을 받았으며 하원에 야당이 다수당이었던 까닭에 직업공무원 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해보지 못한 채로 단임기를 끝냈어야 했다. 그는 재임 중에 그 나름대로의 직업공무원 제도를 실천해 보기 위해서 뉴욕세관장 Chester A. Arthur 를 권고사직시켰다. 뉴욕세관장은 직원을 천 명 이나 거느리고 미국 전체의 관세 중 3분의2를 징수하는 요직인데 그때까지 관례에 따라 뉴욕주 출신 연방상원의원으로 공화당 수구파 거두인 Roscoe Conkling 이 관리해오던 자리였다.
Arthur 의 해임으로 Hayes 와 Conkling 은 더욱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드디어 Hayes 가 재선불출마를 선언하자 차기대통령 후보 경선에 불이 붙었고 극심한 혼돈 끝에 당시 인기가 있었던 제3자 오하이오 주 연방하원의원 James A. Garfield 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천되었다. Garfield 는 Conkling 의원과 수구파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 Conkling 의원의 하수인 정도로만 생각되었던 Arthur 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자 Conkling 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Arthur 는 부통령 지명을 수락하였다. 이 188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Garfield 는 9백만 표 중 겨우 7천 표의 차이로 제20대 대통령으로 Arthur 부통령후보와 함께 당선되었다.
1881년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Garfield 는 선거운동때의 공로로’당연한 권리’로 공직임명을 요구하는 사람들 천여 명으로부터 공직임명 요구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뉴욕 세관장에 Conkling 상원의원의 반대자를 임명하며 ”관례적인” 엽관제도 를 계속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나타냄으로써 공화당 수구파 거두 Conkling 상원의원과 쉽지않은 불화가 노골화 되었다.
1881년 7월 2일에 뉴잉글랜드 지역에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Garfield 대통령이 워싱턴 역에 들어섰을때 공직임명을 받지 못하여 분개해오던 시카고의 변호사 Charles J. Guiteau가 그의 등에 총을 쏘았다. Guiteau는 “나는 수구파이다. 이제는 수구파인 Arthur 가 대통령이다:”라고 외침으로써 자신의 암살동기를 밝혔다.
Garfield 대통령은 11주 동안 병상에서 신음하다가 9월19일에 운명함으로써 재임중 암살당한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Garfield 대통령의 암살은 미국역사가 암살자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수구파의 하수인 정도로만 인식되어 왔던 Arthur 는 막상 대통령 직에 올라서자 그의 진면목을 나타내 그의 지지파나 반대파를 함께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1882년 국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직업공무원 제도를 강력히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대통령의 암살로 엽관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었던지라 1884년의 총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 운신의 여지가 없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실 그는 뉴욕세관장 시절에도 수구파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세관행정의 개선도 해왔던 사람이었다.
드디어 1883년 1월 18일에 오하이오 주 민주당George H. Pendleton 연방 상원의원이 발의한 직업공무원제도를 규정한 Pendleton Act 가 상하양원을 통과하였다. 이 법은 연방공무원의 15%인 1만5,000의 자리를 직업공무원으로 분류하고 그 자리에는 직업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채용되도록 규정하였다. 중립적인 직업공무원 위원회 (Civil Service Commission) 이 시험을 관장하도록 하였고 정치적인 이유로 공무원을 임용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공무원의 정당헌금을 불법화 시켰다.
Arthur 대통령은 강직한 사람을 위원장에 임명하였고 이 법이 준수되도록 제반 규정을 만들었다. Arthur 대통령은 “자리가 사람을 높여주는 것” 같은 좋은 예를 보여준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재임중 관세제도의 개선, 특정지역의 이익을 위해 제정된 낭비적인 의원입법의 반대, 미국해군의 증강 등 수구파 하수인답지않은 치적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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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