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80) 남북전쟁 이후의 정치적혼돈①

2015-11-27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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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가들 중에는 남북전쟁 종전 후의 미합중국 재건을 위해서는 링컨 대통령 같은 대통령이 몇 번 더 나왔어야 했었다고 얘기한다. 미국 대통령들 중 다섯 명의 최열등 대통령들이 었었다고 간주되는 부캐넌 대통령을 선대로 (15대), 앤드류 존슨 대통령을 후대로 (17대), 그 중간에 링컨은 제16대 대통령으로써 남북전쟁을 승전하여 미합중국을 존속시키기만한 채 Booth 의 암살로 갑자기 떠났어야 했다. 남북 총계 56만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명색 승전은 하였지만 구심점이 되어오던 지도자를 잃은 북부 (미합중국) 는 극도의 불화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역설적으로 Booth 의 링컨 암살은 이런 면에서 성공적인 것이었다.

종전 후에 북부에서는 반역죄를 범한 남부를 징벌할 것이냐? 용서할 것이냐? 를 두고 극도의 불협화음이 높아졌다. 남북전쟁중 대부분의 전투들이 남부에서 진행되었던 까닭에 남부의 농장, 공장, 창고, 철도, 교량, 공공건물, 학교, 주택, 교회들까지 모두 파괴 되어 남부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 있었다. 종전후에는 북부가 남부를 먹여 살리든지 아니면 하루속히 재건이 되도록 하는 정책을 쓰던지 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와 북부의 군에서 제대한 엄청난 인력의 사회복귀가 문제이었고 군수공장에서 탄환대신 농기구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으며 철도와 도로와 교량을 재건해야 했으며 학교를 다시 짓고 학생을 모으고 교사들을 채용했어야 했다.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으나 세원도 말라있었으며 세금을 징수할 관공서도 없었다. 남부를 하루속히 재건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동의하였으나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까지 하여야하는 문제에는 극단에서 극단에 이른 주장 들이 분분하였다.


온건주의적 대정치가 이었던 링컨 은 한참 남북전쟁이 치열하였던 1863년에 이미 전쟁종료 후에 쓸 비교적 온건한 대남부정책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1865년 3월 4일에 두 번째 대통령 취임사에서 링컨 은 “Malice toward none, charity to all …” 이라는 통치 철학을 선언한지 41일 만에 암살되므로써 그 철학을 정책에 미처 반영하지 못하였다.

종전후에 가장 온건했던 정책은 남부주들을 용서하고 원래대로 받아드리자는 것이 었고 가장 극단적인 정책은 “남부주들이 미합중국을 자진해서 탈퇴했거나 아니면 미합중국 헌법을 위법해서 반역했던 것이므로” 종전 후에는 남부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여 새 주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중도화합주의자 들은 양극단 사이에서 절충안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남부주들이 헌법상 허용되지않은 탈퇴를 한 것이므로 적절한 벌을 받아야 하기는 하지만 종전 후에도 여전히 합법적인 주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당이던 공화당의 급과파 (“Radicals” 라고 불리웠던 이 정치인들은 급진적이고도 과격한 사람들이었음) 들은 CSA (남부미국) 에 가담했던 모든 남부주 들을 미국의 영토 (territory) 로 만들고 군정하에서 새 주헌법을 제정하고 새 주의 설립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헌법으로는 대통령, 상원, 하원이 미국정부를 움직인다. 소위 Reconstruction Era 라고 불리우던 남북전쟁 종전 후의 정치적 혼란에 빠진 미국의 정치를 주도하던 삼총사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삼총사가 모두 권총을 똑바로 쏘는데 서툰 사람들이었다. 링컨을 승계한 앤드류 존슨 대통령, 상원을 주도하던 찰스 슈머 상원의원, 하원을 주도하던 Thaddeus Stevens 하원의원 등이 주요 등장 인물들이 었다.

앤드류 존슨 대통령

링컨대통령의 부통령으로 1865년 3월 4일에 취임한 후 링컨의 암살로 42일만에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사실상 full term 의 제17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인데 여러 면에서 자질이 모자라는 정치인으로써 미국역사상 가장 어려운 때에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진짜 존슨 이 누구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데 미국 역사가들의 존슨 에 대한 평가도 역사가들에 따라, 또 저술 연대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하위급 대통령으로 평가 된다는데 어떤 역사가는 최하위 다섯 대통령 중의 하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미국대통령 중 최하위 학력자 이었던것은 분명하다. 평생
총 1년의 학교 교육밖에 받지못한 링컨 대통령의 후임자답게 존슨 대통령은 완전 무학자 이었다. 18세에 결혼한 존슨 은 16세에 신부가 된 그의 부인으로부터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고 하는데 엄청난 독서가로써 정치인이 된 후에도 꾸준히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Raleigh 에서 별 볼일 없는 하위직 공무원의 삼남매 중 막내 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청소부일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존슨이 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는데 청소부라는 직업이 천직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였지만 존슨이 그의 형과 모습이 달랐었다는 이유로 존슨이 친부의 소생이 아니었다는 소문도 있었 다고 한다. 홀어머니는 네살 위인 형과 열살이 되던 존슨을 양복제조사 (tailor) 의 도제로 보냈는데, 존슨이 21세가 될 때까지는 의무적으로 계속 일해야하는 계약을 맺고 들어갔다. 계약 의무를 완수하지 않으면 체포하여 벌금도 내게 할 수 있고 근처에서는 영업도 할 수 없는 제도이었던 모양으로 도제생활 몇 년 끝에 계약을 위반하고 도제생활을 떠난 존슨은 고향을 떠나 테네시 주로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주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양복 제조사 밑에서 숫자나 조금 쓰는 것을 배웠던 무학자이었으나 테네시 주의 그린빌(Greenville) 라는 곳으로 와서 양복상를 개업한 그는영업에 성공하여 곧 그 지역 의 소재벌이 되었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아마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던 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소시에 시의원이 되었고 곧 이어 시의회에서 시장으로도 뽑혔다. 그는 대중연설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하며 얼마 후 주의원에 당선되어 10여 년간 이름을 날리다가 테네시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주지사 임기가 끝날 때에 당시의 간접선거 제도에 따라 1856년에 주의회에서 연방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연방정치에 참여하게 되는데 민주당소속으로 연방 정계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60년의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서보기도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링컨 후보가 민주당의 스티브 더글라스 후보를 누르고 당선 하였고 남부주들의 연방탈퇴가 시작되었었다.

링컨의 대통령 취임 전.후로 남부의 모든 주들이 다 탈퇴하였는데 남부주 출신 상원의원 중 유일하게 테네시 주 출신이었던 존슨 은 “연방분열불가”를 주장하면서 상원의원직을 사직하지 않았다. 이런 정치행보 가 신임 링컨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북전쟁 중에 북군이 테네시 주의 절반정도를 탈환하자 링컨은 그때 연방상원 의원의 임기가 끝나던 존슨 을 육군준장에 임관시켜 테네시 주의 군정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존슨 의 가족들은 남부군 지역에 있었으나 얼마후 남부측에서 가족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존슨은 전형적인 남부출신 정치인으로써 민주당원이 었으며 연방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주의 권한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었으며 친노예주의자였다. 그는 노예 여덟 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구입한 피부가 별로 검지않은 혼혈 흑인여자 노예가 피부가 더 하얀 아기를 세 명이나 출산하자 그들이 존슨의 자식들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는데 당시에 성노예를 구입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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