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남북전쟁 (Civil War ) (7)

2015-10-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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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이날 이후 북군장병들이 만세로 승전을 축하하려 하자 Grant 장군은 “남군도 우리와 똑같은 한 나라의 국민이다” 라고 말하면서 즉시 환호를 중지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Lee 장군의 항복후에도 17만5천명의 미항복 남군이 있었으나 Lee장군 수준의 지휘력을 가진 남군의 장군은 한명도 없었다.

1865년 4월 26일에 Joseph E. Johnston 장군은 North Carolina 주의 Durham 에서 North Carolina 의 Raleigh 를 함락하고 올라오는 Sherman 장군에게 98,270명의 장병과 함께 항복하였다. 이 Johnston 장군의 항복은 남북전쟁 중 최대 병력의 항복이었는데 이들은 포로로 처리되지 않았다. 마지막 항전이 1865년 11월에도 있었다고하나 사실상의 남북전쟁은 Lee 장군의 항복으로 끝났다.


남북전쟁 중의포로수용소
원래 포로라는 신분은 학대를 받기 쉬운 것이기는 하지만 남북전쟁중의 포로들은 더욱 처참한 학대를 받았었다고 한다. 북군으로써 포로가 된 사람이 21만여 명이었고 남군포로 는 20만여 명으로 총 41만여 명의 포로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한 사람이 5만6천여 명으로써 (북군 3만, 남군 2만6천명) 남북전쟁 총사망자의 10%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포로수용소에 따라서 12% 내지 28% 가 병사 하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포로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포로교환이 있었는데 말기에는 포로교환이 중지되었다. 병력이 모자라던 남군이 포로교환으로 석방된 남군포로들을 다시 징집하여 전투에 재참전 하도록 하였던 까닭이다. 흑인군인들은 노예이었음으로 교환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었다. 남부에서는 포로수용소에 사람이 거주할 시설이 없는데도 있었고 만 명이 수용될수 있는 포로수용소에 3만6천명까지도 수용했었다고 한다.

남군장병들도 먹을 식량이 없었던 때도 있었던 까닭에 남부의 포로수용소에는 먹을 물 조차 없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남부에서는 포로가 경계선을 넘어서면 즉시 총살하였고 포로수용소 내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대포를 포로수용소에 조준해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 남북 양쪽은 포로들을 자국의 군대로 편입시키기도 하였으며 북부에서는 포로들을 아메리칸 인디언 토벌작전에 쓰기도 하였다.

Lincoln 대통령의 암살
Lincoln 대통령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강경하기도, 또 유연하기도 했던 위대한 정치가 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문제를 타협으로 해결할줄 아는 도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자 하는 정치인 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노예해방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극단적인 반인종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에게 한가지 극단적인 정치신념이 있었다면 그는 절대적인 Unionist (미합중국존속주의자) 이었고 미합중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더러 Lincoln 때문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거나 아니면 Lincoln 이 남북전쟁을 시작한 대통령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 건국초기부터 쌓여오기 시작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불화와 내분은 언제이던간에 남북전쟁에까지 이르게 되어 있었으며 아마 Lincoln 이 기왕에 치뤄야 할 홍역을 조금 빠르게 치루도록 하였고 병을 앓고 있는동안에 미국이 죽지않도록 잘 간호 하였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적 임무가 끝나자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인도한 끝에 가나안이 보이는 지점에 와서 사라진 구약성서의 모세의 생각이 났다. 두 사람이 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를 완수 하고 타의에 의해서 간 것이었다.

Lincoln이 암살된 후에 일어난 정치적 혼란과 미국의 재분열을 보면 “Lincoln 이 재선된 임기만 채우고 갔었으면 …” 하는 분통함이 있고 만일 그랬다면 “남북전쟁이 오늘까지 계속되지는 않았을텐데” 라는 답답함이 있다.


Lincoln은 남북전쟁을 “북부의 승리”가 아니라 미합중국의 승리로 끝나게한 필수불가결의 지도자이었던 까닭에 그의암살은 남북전쟁의 테두리 속에 포함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암살은 첫 번째 미국대통령의 암살사건 이었다기 보다는 남북전쟁의 grand finale 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남북전쟁’”의 마지막장으로 Lincoln 의 암살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Lincoln 대통령의 암살범 John Wilkes Booth 는 Lincoln 과 묘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연극배우의 전부 배우가 된 세 아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제법 인기도 있고 성공한 배우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노예제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믿는 거의 광신적인 남부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의 지지자이었다. 그는 남부의 모든 문제의 원흉이 Lincoln 이라고 생각하여 Lincoln 을 극도로 중오하는 인물이었다.

John의 형인 Edwin Booth 는 주로 셰익스피어 비극들의 주역을 맡은 유명한 배우로서 Lincoln 의 장남 Robert Lincoln 이 어느 기차 정거장 플랫폼 에서 발을 헛디뎌 위험에 빠진 것을 구출해 준 사람이다. 또 John 의 “비밀약혼자”의 아버지는 Lincoln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John 은 Lincoln 은 암살되어야 할 악인이거나 납치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중에 Lincoln 의 생명을 노렸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864년 8월에 Lincoln 을 암살할 음모가 있었었다고 하는데 음모자들의 신분이 분명히 밣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Booth 는 Lincoln 암살 6개월 전에 그를 납치하여 남부측에 인계하여서 북부가 항복하거나 모든 남부포로들과 교환할 계획도 했었다고 한다. 그는 약혼자 아버지와 Lincoln 과의 친분덕택에 1865년 3월 4일에 있었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 으며 그날 Lincoln 을 암살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일기에 적어 놓았었다한다. 실제로 그는 1865년 3월 17일에 Lincoln 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Lincoln 이 갑자기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암살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4월 11일에 백악관에서 Lincoln 이한 종전이 된 남북전쟁 이후에 Lincoln 이 펼쳐나갈 화해와 국가 재건설에 대한 연설을 듣고 더욱 Lincoln 을 증오하였었다고 한다.

Lincoln 은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않은 Ford’s Theatre 에 가기를 좋아해서 그전에 열두 번이나 갔었고 John Booth 를 배우로써 좋아해서 백악관을 방문하라는 쪽지도남겼으나 John 은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4월 9일의 Lee장군의 항복으로 사실상의 남북전쟁이 끝난것에 대한 기쁨을 Lincoln 은 감출 수가 없을 정도로 행복해 하였다. 그는 이미 남북전쟁이 격전 중이었던 1863년 12월 8일에 “Proclamation of Amnesty and Reconstruction”(대사면과 국가재건에 대한 포고) 를 발표했다. 이 포고는 Lincoln 의 대정치가로의 아량을 잘 보여주는 것인데 전쟁이 끝난후 에 까다롭지 않은 대사면이 가능하다는 것과 남부사람들의 국가 재건참여를 권장하는 내용이었다.

Lincoln 이 항상 앞을 내다 보고 원대한 계획을 미리하는 지도자임을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포고 발표당시 에는 남부측의 냉소를 받았었지만 남북전쟁이 끝나고 Lincoln 이 암살된 후 미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을때 이 포고는 국가의 장래를 바로 잡게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 포고는 추후에 조금 더 상세하게 분석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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