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자리, 엄마의 자리, 그리고 며느리 자리를 다시 태어나 맞게 된다면, 이번 생애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결혼 후 25년의 아내 자리는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여태껏 보고 경험한 것들을 사용하면서 지혜롭게 풀어 나간다. 시부모님 모시고 일곱자식을 키운 엄마는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자식들을 대학 공부시킬 수 없다고, 우리집의 작은 방들을 밤늦게까지 손수 도배한 후 월세 놓으면서 억척스럽게 사셨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자란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때 그 모습의 엄마를 떠올리면 못 헤쳐 나갈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 옆에서 아내 역할하는 엄마의 모습은 기억해낼 수가 없다. 두분이 함께 다정히 계시는 모습은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래서일까? 아내로서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어렵게만 느껴진다.
참으로 부부관계는 오묘하다. 아무리 가깝게 살아도 때로 한없이 남보다 더 미워지다가도 또 한없이 측은한 마음도 든다. 늘 티격태격 싸워 위태롭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당신밖에 없어’라는 말을 간직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익숙해져 편해진 것 때문에 상처되는 말을 함부로 내뱉게 된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평생 안고 가게 될 마음의 상처를 준다.
앞으로의 삶에 있어 남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자식은 자신의 인생을 찾아갈 것이고 우리는 남은 인생을 함께 할 것이다. 좀 늦은 감이 있고 한번도 부모님한테서 보지 못해 좀 어색한 감도 있지만, 어차피 헤어지지 않을 바에야 부부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사는 지혜를 배우고 싶다.
여태것 쌓아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의 삶에서 서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부의 자리를 찾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자신부터 지난날을 반성하고 싶다. 아이들 중심에서 살다보니 남편에게 본의아니게 무심하고도 투박하게 대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섭섭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별일없이 기다려준 남편에게 우선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지금 이 순간부터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