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기 전 나는 여자 이전에 한 인간이었다. 간혹 여성 문학을 하는 분들을 보면 왜 좁게 생각을 나누어 하는지…내가 더 거대한 문학 세계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결혼 후 미국에 유학생으로 공부하러 왔다.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낯선 환경인데, 이젠 마시는 물도 숨쉬는 공기도 심지어 매일 사용하던 언어까지 바뀐 환경에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결혼하기 전 학생으로 살아온 경험들은 살아갈 새로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혼 후 남편은 계속 살아온 삶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여성인 나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요구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여자에게 결혼은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의 역할만이 요구되는 삶이다.
그때부터 나의 삶은 혼돈 그 자체였다. 여태까지 자신과 세계의 소통을 꿈꾸면서 살아온 나는 그때부터 내 안에 두 세계를 품고 현실과 내면의 불일치를 겪는 고통스러운 여성적 숙명이 시작되었다.
여성으로 자신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밥하는 부엌일도 아이를 기르는 일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었다. 처음으로 여성의 삶을 자각했고 왜 여자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 불평등하게 작용하는지 느꼈다. 또한 앞으로 엄마로서 살아야만 하는 삶의 무게도 느끼면서 어떻게든 잘해 보려는 나의 내면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차 있었다.
지난 20년을 살아온 지금, 두 아이를 다 키운 엄마로서 결혼 후 마음 아프게 잃어버린 시간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한 80학번 세대는 눈부신 과학 문명의 발달로 제 3의 인생을 살아갈 충분한 여건도 마련되어 있다.
거기에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터득한 내공까지 더해져서 여자의 삶 속에 그 나름의 특별한 행복도 녹아져 있다. 불평등하기만 여자의 삶을 그린 지난 세기의 여류 작가의 외침은 그 상황에서는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많이 힘들어 했던 엄마의 자리에서 인생은 대단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임을 배웠다. 결국 크게 보면 모든 길이 이어져 있듯이 우리 인생도 문학도 처음부터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삶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제이지,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여전히 한 여자 이전에 세상의 한복판에서 꿈꾸는 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