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t Boys’란 남부 수단의 고아로 간주되는 10대나 20대 초의 남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 전에 살던 곳을 방문하는 중, 그곳의 한 병원에서 옛 학생을 우연히 만났는데, 수단에서 온 Lost Boys 학생 중의 하나였다. 그 병원에서 X-Ray 테크니션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이 학생은 우리 사무실이 관할하는 ESL Computer Lab에 거의 매일같이 공부하러 왔었다. 한 여름 방학에는 어떤 수단 학생들이 결혼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이 학생은 안가서 물었더니, “저는 공부 끝내고 결혼해도 된다”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도 둘이 있다고 했다.
물론 공부를 다 못한 학생도 있지만 반면에 다른 학생들은 공부하여 학교 선생, 컴퓨터 전문가, 대학원을 진학하고, 복지재단을 만들어 자기 고향인 수단에 학교, 병원 등을 짓고 있는 졸업생도 있다.
미 국무성은 2000년 초에 에티오피아와 케냐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청년들을, 그들의 정착을 위해 초청하여 각 구호단체들에 의해 스폰서를 통해 미국의 여러 곳으로 보내진 것이다.
여자 고아들은 수단 문화에 의해 수용소 생활이 허용이 안 되고 대개 친척집에 살고 있어서 정착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 학교에는 100명 이상의 수단학생이 입학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그들에게 적절하게 교육시키는 일이 큰 도전이 되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고등학교 졸업자가 아니었다.
그때 마침 우리학교에는 ‘Ability To Benefit’ 이란 프로그램이 있어서, 시험을 통해 대학 공부를 할 능력이 있다고 판정이 나면,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기초실력이 인정되었다 하더라도, 문화의 격차가 심했고, 컴퓨터 등 테크놀로지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고아가 된 이유는, 북부의 이슬람 지역과 남부의 기독교 지역이 전쟁 중이었고, 수단에서는 남자아이들은 7, 8세가 되면 들에서 소를 모는 일을 하는데, 소를 몰고 멀리 물 가까이 가 있는 동안 적군들이 마을에 와서 사람을 해치고, 집을 불태우는 바람에 걸어서 걸어서 맨발로 에티오피아까지 피난을 갔다 한다.
물론 피난도중 많은 어린이들이 짐승들이나, 사고로 희생됨을 목격했고, 소설에서나 읽었던, 목이 말라 소변도 마셨다 했다. 살아남아서 우리 학교까지 오게 된 Lost Boys들은 불절굴요로 모두 야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들은 키가 대개 6feet 이상 이었고, 피부는 몹시 검었다. 학교 복도를 그 학생들 여럿이 함께 걸어가면, 모두 키가 천정에 닿는 듯 했는데, 적도 가까이 살아서 키가 크다고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한 ‘Lost Boys 다큐멘터리’ 비디오 끝에 ‘우리는 전쟁으로 엄마와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이지만, 교육이 우리 부모다’ 라는 끝맺음에 가슴이 뭉클하며, 어쩐지 이 학생들의 이러한 생각이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라의 자원이 부족한 한국 사람들도 오로지 교육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 가짜 명문대 입학 에피소드가 나오게 된 것 같다. 한국 가정은 사회 경제 층을 막론하고 자녀교육이 그 집안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예부터 집 팔고, 땅 팔아서도 자녀교육을 시킨 것, 우리가 다 들어온 이야기이다.
그동안 몇 전문 직종 교육에만 몰두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에 자녀들 재능에 따라 실시하는 다양한 맞춤형 교육은 앞으로 이런 명문대 강박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황병남 <메타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