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변소연 ㅣ 기억의 습작
2015-06-19 (금) 12:00:00
이따금씩 모든 기억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가지런히 정돈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휴대폰 사진폴더에서 오래된 사진들을 찾기 위해서는 한참 스크롤을 내려야 하는 것처럼.
정말 아무런 이유없이 어떤 기억들이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온갖 기억들은 뇌가 잠시 쉬고 있는 틈을 타 무자비하게 헤집고 들어온다. 비교적 최근 겪었던 만남에서부터 벌써 수 년이 지난 이별, 그리고 심지어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보통의 순간들까지 흘러버린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선명한 기억들 때문에 나는 매번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뇌 기억장치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나게 정리정돈을 못하는 것이라고, 그저 조금 허술하게 생겨먹은 것뿐이라며 스스로를 이해해본다.
기억이 무작위로 찾아드는 것.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어떤 기억이 다시 재생됐을 때, 나도 모르게 중간에 끊어버리게 되는 기억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매일 새로운 기억들이 덧대어져 이제는 아물었을 것 같았던 과거의 기억 중에는 여전히 아픈 것이 있었다. 끝까지 재생시키지 못한 채 넘겨버린 구간들은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결국 완벽히 지워져버리기를, 나는 바랐다.
자꾸 다시 찾아오는 기억들은 현재의 삶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내가 온전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사건사고들은 많고 그것에 대한 기억마저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나는 점점 위험을 기피하게 됐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자 쉬운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관계는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부담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보니 나는 사람을 알아가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는 방법을 점점 잊게 되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그런 삶이 나에게 꼭 맞는 느낌은 아니었다. 마음 한편에는 예전 내 모습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아직 남아있었다. 나의 어색하고 건조한 행동들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비록 예전처럼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감과 방식은 잃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씩 연습하고있다. 쌓이는 기억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과거의 모든 순간들은 더 나은 오늘을 위한 습작임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