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나는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 세계에 완벽하게 빠졌었다. 소설가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나는 현실인 것처럼 즐겼다. 카잔차키스의 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장편소설은 실존 인물인 조르바에 대한 기억을 작가가 재구성해 쓴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도 있게 본 소설 중에 하나로, 생동감 있는 비유와 솔직하고 섬세한 묘사 덕분에 나는 밤새 희열을 느끼며 조르바의 세계를 구석구석 탐험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가 소설 속 주인공에 완벽히 감정이입하기보다는 그 주인공을 그려내는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을 때는 각 단편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이 던지는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하루키의 의도를 읽어내는데 재미를 붙였다.
어느 단편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마지막 대사로 읊은 근사한 감탄사에서, 그 대사 한 줄을 위해 며칠 밤을 고민하다 마침내 마지막 느낌표를 찍고 통쾌하게 엔터를 탁! 치는 그 순간 하루키가 느꼈을 짜릿함까지 상상했다.
소설 속 주인공과 그 뒤에 가려진 작가까지 이해하는 작업은 마냥 재밌었다. 나는 소설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것은 소설가만의 타고난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은 그 행위를 진정으로 즐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내가 기욤 뮈소의 ‘종이 여자’라는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책의 주인공은 기욤 뮈소와 같은 일류 소설가이다. 목숨 바쳐 사랑했던 한 여자로부터 비참하게 버려진 후 그의 상상력의 샘물은 마르고 풍부했던 어휘들은 다 증발한다.
마침내 벼랑 끝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소설처럼” 그의 전작 소설 여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나게 되며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기욤 뮈소가 이 소설에 자신을 얼마큼 녹아냈는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많은 소설가들이 겪는 작문의 어려움과 정신적인 소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가 표현한 대로 글쓰기에 빠져 살다 보면 종종 현실의 자리를 허구에 내어준다.
끊임없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소설가들에겐 소설 속 주인공들이 현실처럼 나타나 오히려 작가들이 현실에 안전하게 소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소설가의 고충까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내 삶에 더 집중하고 싶어졌다. 적어도 지금은,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현재에 100% 몰입할 때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