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산문] 최정 ㅣ 흙

2015-02-1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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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도 그랬고 대학에서도 특별활동이라고 한게 연극이었다. 사실은 그림, 사진, 문학, 서예, 도자기, 꽃꽂이.. 등 하고싶었던 게 감당하기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언제나 배반할 수 없는 오랜 연인처럼 마음이 연극쪽으로 갔다.

신명나서 공연을 하고 마지막 무대 커튼이 내려지면 허무하고 슬퍼서 실연한듯, 마음을 다잡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리곤 했다. 그 허무함과 허전함이 힘겨워 연극을 하는 내가 싫기도 했고 세월을 낭비한듯 쓸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헛되이 보낸 그 시간에 야무지게 그림이나 서예, 도자기 같은 데 써서 자신이 투자한 노력과 시간의 결과물을 자랑스레 내보여주는 친구들이 부럽고 나 자신이 실속없는 바보같았다.


세월에 실려 이리 저리 흐르다 결국 미국에 와서 그림을 하게 됐다. 한동안 정말 타는듯한 갈증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제 작업실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왔다. 오랜 시간동안 정말 과분한 호사를 한 셈이다. 그 모자란 재능과 고쳐지지 않는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몇 번 전시회도 하고 한동안 제법 팔리기도 해서 사실 이제는 내 손에 남겨진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도 정작 정리하려 들여다보니 이십여년을 쟁여온 물건들이 장란이 아니게 많다. 내 집에는 이 모든 잡동사니들을 들여놀 자리도 없고 그렇다고 생각하기 따라서는 그저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물건들을 창고를 세내어 모셔둘수도 없고 착찹하다.

어떤 화가는 수십년 그려온 그림들이 단 오분간에 불에 홀랑 타버려 재가 되었다는데 왜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지 남몰래 부럽기까지 하다. 지난 세월의 얼룩이 남겨진 그림이며 잡다한 도구들을 정리하려들면 느닷없이 떠오르는 가지가지 예전 생각에 바삐 움직여야 할 손을 놓고 또다시 안개속 같은 미망에서 헤메고 앉았을 것 같아서.

이렇게 모든 게 귀찮은 내 마음을 빠안히 들여다 보실 그 분은 복잡한 게으름속에서 꾀 부리는 내 모습을 보며, 야, 공것 바라지 마라! 네가 어질러 논 것은 네 손으로 치워야 할 것 아냐! 호통치실 것 같다. 차마 내손으로 태울 수야 있나. 그러나 부등켜 안고 끼고 있자니… 쩝.

이제야 나는 내가 왜 연극같이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안남는 그런 예술을 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또 다시 바보같아 보인다. 우리를 활활 태워버릴듯하던 그 수많은 열정과 바램들이 그 길지도 않은 인생노정에서 얼마나 많이, 생각치도 않은 방향으로 바뀌는것인가.

한번 살아본 인생, 결코 되돌아가 다시 살아보고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다시 살아야 할 지경에 처한다면 이번엔 구지 예술가란 허울처럼 남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것 말고, 무언가 결과물로 남지 않는 것, 그리고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것, 남들과 비교할 일이 없는 것, 그런 것을 하며 사는 삶이고 싶다.

정원사라던가 이즈음엔 그런 직업이 있지도 않지만 하루종일 타달타달 걸어다녀야 하는 작은 마을의 우편배달부라던가 혹은 근근히 자급자족하는 농부 같은 것?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움직이다가 지나가는 이와 눈길이 마주치면 잠깐 하던 일 멈추고 소소한 세상사를 나누고 오늘 하루 정말 잘 지내라고 진심어린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것.

그런 삶은 생각만 해도 평화롭다. 겨울답지 않은 겨울을 난 산호세에도 어느새 마른 가지마다 물이 오르고 애기 손가락같은 새 움이 봉긋이 솟아난다. 계절의 바뀜에 온몸을 내맡기고 무심한듯, 꾸밈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나무들은 곧 자신의 몸뚱이가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란 걸 계산치 못하고 하잘것 없는 그림 부스러기를 걱정하는 내 모습이 딱해 뵐께다. (2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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