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고] 김정수 ㅣ 주평 선생 추도사

2015-02-0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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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선생님 글을 읽고 저 나름대로의 느낌을 얘기하면 선생님은 마치 어린애처럼 기뻐하셨습니다. “동생이 내 글 좋다고 하니 나도 좋다. 정말 좋다.” 선생님이 가시기 이틀 전에도 저와 이런저런 글쓰는 얘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자기의 글을 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흉내를 낸다거나, 다른이의 체험을 쓰지 말고 자신의 소리로 자기의 느낌을 자기식으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글에서 항상 선생님의 모습이 봅니다. 항상 소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풋풋한 소년의 체취를 느낍니다. 선생님의 글중에 “의사되라고 의과대학에 보냈더니, 의사 공부는 안하고 딴따라나 따라 다닌다”고 학생시절 아버지께 호되게 야단맞던 얘기, 연극 공연중에 단원이 묵은 여관비를 못내서 아버지 몰래 창고에서 멸치포대를 내다 팔았다는 얘기, 사모님과 선보던 얘기 등을 우리 독자들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딴따라짓 하며 집 재산 축내는 큰 아들이 사람되기는 글렀다고 낙담을 하시던 아버지 얘기를 쓰신 글에는 선생님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을 눈물 역시 우리 독자들은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시절의 문제아 주평선생은 한국의 아동극을 개척하고 성장시켰고, ‘석수장이’ ‘숲속의 대장간’ ‘섬마을의 전설’ 등 선생의 글이 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쓰신 아동극 전집만 10여권, 그리고 주옥같은 수필이 여러권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문인협회 주관의 ‘주평 아동극상’이 제정되었고, 선생님의 고향 통영에는 ‘주평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내 동생들이 나보고 형님은 언제나 철이 드냐고 그래” 그러면서 장난꾼 표정으로 웃으십니다.

동생들이 그렇게 당신을 소년으로 표현한 것이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소년으로만 살다가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글쓰기에 은퇴하신적이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의 두 눈에는 항상 빛나는 서기가 있었고 새로운 창작활동을 향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각본에 연출에 주연배우까지 하신 “효녀 심청” 연극에서 심봉사 역으로 나오신 선생님이 심청이 눈뜨는 장면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춤사위가 어찌나 신나고 멋있었는지 저는 장면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솜털같은 민들레 꽃잎이,바람에 날리어 어디론가 날아가다가 어느 들판에 내려 앉아 또 다른 민들레꽃을 피웠다면…,”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민들레가 피어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다시 솜털같은 민들레 꽃잎이 되어가볍게 날아 가셨습니다. 가신 그곳에서도 선생님의 꽃을 소담하게 피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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