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름 없는 천사들

2014-12-31 (수) 12:00:00
크게 작게

▶ 김형재 사회부 차장대우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우리는 ‘죽음’을 남의 일, 내게는 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쥐려 애쓰고 나누기엔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인간의 이기심을 핑계로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가난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고 치부하곤 한다. 공감과 나눔을 쉽사리 실천하지 못 하는 이유는 ‘내 삶 자체도 힘들다’는 당장의 현실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푸드뱅크 음식을 되팔아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와 15년째 서류미비자로 살아가는 4인 가족 이야기‘(본보 10일자 A4면)를 처음 접했을 때 기자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고백하건데 첫 번째 떠오른 것은 ‘연말 기사거리가 된다’였다. 삶이 정말 어려운 분들의 하루하루가 기자에겐 ‘이런 사연도 있더라’는 이야깃거리가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기사로 채택됐고 지면으로 나갔다.


두 가족의 이야기를 쓰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사연은 안타깝지만 현실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이 나타날까 싶었다. 당장 내 삶 자체도 힘들다는 자기위안이 우선이라는 단정도 무시할 수 없었다.

기자의 편협한 생각을 꾸짖기라도 하듯 익명의 천사들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두 가족 사연을 접한 한인 분들은 현금 1,000~4,000달러를 쾌척했다. 기사가 나간 지 닷새 만에 1만달러가 모였고 현재 1만3,500달러까지 늘었다. 두 가족의 사연을 기자에게 우연히 전했던 봉사단체 관계자는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한번 본 적도 없는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천사들은 누구일까. 그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름 공개를 사양했다. 암수술을 앞두고 후원금을 내신 분, 80대 연세에도 직접 찾아 오신 노인 분, 재활용품을 모아 이웃을 돕는 분, 시부모가 생각난다며 도움을 전한 분 등 우리 주변의 평범한 분들이었다.

익명의 천사들은 모두 겸손한 자세로 삶을 산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인생의 순간순간 좀더 의미 있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80대 할아버지는 “늙어보니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더라.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전했다.

익명의 천사들 덕분에 할머니와 손자, 서류미비자 가족은 꿈같은 선물을 받았다. 손자를 홀로 키우는 조모 할머니는 밀려오는 후원 소식에 “참 감사하다. 한 달 100달러 후원만 받아도 충분하다”며 후원금을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나누길 바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인사회 극빈층 후원계좌’를 개설한 한인타운 연장자센터의 캐서린 문 소장은 “이민사회가 고달프고 힘들어 삭막한 줄만 알았는데 한인들께서 알지도 못하는 이웃을 위해 선뜻 큰 후원금을 내놓는 모습에 동포애와 인간 본연의 사랑을 느낀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한인사회가 참 따뜻하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