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배순혜 ㅣ 채플린 향기

2014-10-0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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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 향기배 순혜 바쁜 손을 놓고 추억에 젖고 싶은 계절이다. 화려한 영상기술의 영화 대신 흑백영화 한편 감상해보면 어떨까. 문득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웃음을 선사한 20세기 초 무성영화 속의 찰리 채플린이 그리워진다.

그가 창안한 ‘트램프(The Tramp)’라는 떠돌이신사 캐릭터는 세계영화의 아이콘이었다. 커다란 구두에 헐렁바지와 꽉끼는 웃옷의 콧수염 신사가 지팡이 돌리며 뒤뚱뒤뚱 길떠나는 뒷모습이 보인다.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되어 방랑하지만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는 동시대인의 열망을 반영한 듯 그의 연기는 익살스러움 이상의 감동을 준다.

그는 천부적 재능의 희극배우였다. 하지만 각본, 연출, 감독 등을 총괄하면서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 도전정신과 열정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1936년의 <모던 타임즈>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대량생산을 위한 컨베이어벨트에서 나사 조이는 단순노동을 반복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고도 눈물겹게 그려내었다.


기계문명이 초래한 인간성의 상실을 남다른 감수성으로 포착해냈다. 그의 첫 유성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1940년 히틀러의 광기에 세계가 휘둘리던 2차대전 중에 반나치 영화로 개봉되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유태인 이발사와 히틀러를 패러디한 독재자 힌켈이 닮은 외모로 뒤바뀌는 해프닝을 채플린이 1인 2역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마지막 연설장면에 거침없이 쏟아낸다.

인류는 차별, 탐욕과 증오를 넘어 서로 도와야 하며 과학기술의 발전보다 인간애, 지식보다 친절과 관용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또 압제로 고통받는 민중들이 인권회복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호소한다. 이 영화로 냉전시대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추방되는 수난도 겪었지만 그의 통찰력과 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에까지 공감과 도전을 준다.

진정한 유머는 인생의 부침을 견뎌내고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는 그의 철학은 부친의 죽음과 빈민구호소 생활 등 유년기의 불행을 극복해 낸 힘이기도 한 것 같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말해주고 우리의 연인 피에로는 떠나갔다.

고통스런 현실을 한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즐거워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단다. 이 가을, 진한 커피향 같은 채플린 향기에 젖어보면 좋겠다. 잠시 일상을 벗어나 그 향기 따라 방랑의 길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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