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환경과 삶] 김희봉 ㅣ 울돌목의 울음

2014-08-19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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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형, 신나게도 요즘은 이순신의 <명량(鳴梁)>이 대세입니다. 마침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의 후의로 영화 시사회에서 <명량>을 보았습니다.

L형, 신이 난게 나뿐 만이 아닙니다. 한국에선 불과 십수일만에 천이백만 관객이 몰려드는 신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층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사회전반에 독버섯처럼 퍼진 패배감에서 새 희망과 승리의 메세지로 숨통이 트이는 성취감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통쾌하게 쳐부순 충무공의 드라마는 허구가 아닙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더욱 폭발력을 지닙니다. 아무리 암담한 현실 앞에서도 지도자의 철학과 전략이 분명하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불끈 용기가 생깁니다.


“장수는 충(忠) 을 쫓아야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 장군의 철학이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명량에 나간 이유가 임금이나 정치적 야심이 아닌 오직 백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집단적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오직 죽기를 각오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수하들에게 설파합니다.

L형, 저는 영화를 보면서 오랜 숙제를 풀었습니다. 명량대첩때 쇠줄을 달아 왜선들을 전복시켰다는 건 설화일 뿐이란 것입니다. 쇠사슬 설화는 기적같은 승리의 의문을 풀기 위해 나온 것이었습니다. 승리의 관건은 평균 폭이 250m에 불과한 협수로의 지형적 여건과 조류의 흐름을 최대한 활용한 충무공의 전략이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보았듯이, 장군은 조선함선들을 명량 바깥쪽에서 입구를 차단하며 횡렬로 벌려 서서 12척 모두가 화력을 운용할 수 있도록 포진시킵니다. 이 포진으로 왜함선들이 좁은 물목으로 선두 10여척만 들어오도록 유도합니다. 왜군은 협수로에서 기동이 원활하지 않은 대선인 아다케를 제외시키고, 조선의 판옥선보다 작은 세키부네 130여 척을 해전에 투입했습니다.

이는 한산해전과는 정반대의 전술이었습니다. 한산해전때는 수로가 좁은 견내량에서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격파했다면, 명량해전은 적을 협수로로 끌어들여 그 입구를 막아서서 전투를 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선수군의 전투역량이 한산때는 우세했고, 명량때는 절대적 열세였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왜선의 약점도 잘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왜선은 뱃머리가 뾰족하고 쇠못을 박은 안택선(安宅船)이었습니다. 속도는 빠르나 삼나무로 만든 선체가 약해 화포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배는 튼튼한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板屋船)으로 뱃머리가 둥글고 침수면이 적어 회전이 용이했습니다. 우리 배의 화포, 천자총통도 조총보다 위력이 훨씬 컸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명량해전 승리요인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합니다. 명량의 지형과 급류를 이용한 전술, 총통으로 무장한 강력한 판옥선의 전투력, 그리고 수군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수 있도록 한 지휘력을 꼽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역량인데도 그는 <난중일기>에서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L형, 이런 인품이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을 다시 새겨보게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전율을 느끼는 것이 그의 정면돌파입니다. 위기때마다 직진합니다. 필패라고 말리는 수하들, 병을 핑계로 낙향하라는 아들의 간청, 심지어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명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장군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전략을 세운 후 정면돌파합니다.

둘째는 솔선수범입니다. 그는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자신이 십자가를 집니다. 명량해전에서 대장선을 타고 나아갈때에 다른 배들은 물살을 구실로 뒤로 쳐집니다. 그때 그는 오로지 홀로 왜선들을 맞습니다. 그 솔선수범이 수하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놓습니다.

셋째는 “죽으면 살리라”하는 생사관입니다. 필사즉생.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치모리배들은 오직 저만 살려고 백성들을 버리는 “필생즉사”에 매달려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나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명량에서 물은 겨울산속 짐승의 울음소리로 우우 울면서 몰려갔다. 말잔등처럼 출렁거리는 물결이 수로의 가운데를 빠르게 뚫고 나가면, 밀려난 물은 흰 거품으로 소용돌이치며 진도 쪽 해안 단애에 부딪쳤다. 물이 운다고, 지방민들은 이 물목을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L형,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울음을 원한 맺힌 백성들의 울음소리, 수장된 조선수군들의 곡소리로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그 울움을 승리의 함성으로 바꾸어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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