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김숭 목사 ㅣ 진리와 충돌하다

2014-08-0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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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크라멘토 수도장로교회 담임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그가 ‘가치’의 가치를 안다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세울 가치가 아예 없거나 그것을 찾으려고도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동물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생일 수 있다.

그럴 때의 인생은 매우 소모적이어서 사회 전체에 이바지하기는커녕 해악을 끼치기까지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의식이 자라가면서 나름의 가치를 발견해 그것을 세워 갈 줄 안다.

아들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걔 세 살 때의 가치는 파워레인저였다. 그땐 어딜 가도 파워레인저였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친구를 만나도 파워레인저처럼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발차기를 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땐 영화 ‘반지의 제왕’이 그의 가치였다. 그때는 영화에 나오는 골룸처럼 소파와 마루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프레셔스, 프레셔스” 소리치고 다녔다. 그러더니 중학교 땐 스케이트보드로 전환했다. 너 나중에 뭐 될래 물으면 ‘프로 스케이트보더’가 되겠다고 했다가 부모인 내 마음을 잠시나마 먹먹하게 했다. 그땐 아들은 스케이트보드를 방 한 가운데 제일 좋은 데 모셔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걔가 자라면서 그의 가치를 진화시킬 줄 알았다는 점이다. 자의든 아니면 그를 둘러싼 환경 때문이든, 아이는 그의 가치를 비교적 더 고상한 쪽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을 함양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물을 넘어선 걔의 지금의 가치는 훨씬 더 고상해졌고, 급기야 새로워진 그 가치는 그의 인생의 미래와 직업을 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무척 다행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인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가치는 이처럼 계속 진화해야만 하는 것일까? 또는 진화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소박한 가치나 덜 중요한 가치야 자꾸 변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멋 내는 데 온통 돈과 에너지를 쓰던 사람이 절약 모드로 인생을 바꾸어 소박함의 품위를 지키는 일에 더 몰두하는 것 같은 것, 또 여성잡지만 읽던 사람이 문학적인 소설책도 섭렵하는 것 같은 거다.

그러나 이런 것 말고 인생의 지축을 흔들 만한 가치 같은 것은 다르다. 그런 게 만약 존재한다면, 사람은 그런 가치를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꼭 만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가치와의 조우가 그의 인생의 향방을 확실하게 바꿔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가 될 때 이를 경험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목사라는 존재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랐다. 그러면서도 내 스스로 목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도 해보지 않은 그 자리에 내 자신을 대입시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한 영원한 가치가 내 인생에 파고들어 나를 송두리째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작품 ‘노년/The Last Year’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를 아는 것은 진리에게 자신이 알려지는 것이다.”

진리는 내가 붙잡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진리에 내가 붙잡혀서 얻어지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의 이 표현의 주인공이 내가 된 것이며, 이 경험이 결국 나를 목사 되게 했던 것이다.

한번 사는 인생이다. 두 번 사는 인생은 없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게 목숨 걸만한 진리와 조우가 없다면 되겠는가? 또는 진리와의 충돌을 애써 기피하면서 산다면 되겠는가?

나의 전 존재를 함몰할 만한 가치와 진리, 또는 위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워하며 살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나의 인생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조만간 모두에게 이런 사건이 있었으면 하고, 그 중에서도 진리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만나는 건 이 면에서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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