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로서 그가 하도 유명하기 때문에 정명훈이 원래는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잊고 있었다.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한 정명훈은 9세 때 시애틀 심포니와 5회나 협연했고, 15세 때는 누이들인 정경화ㆍ정명화와 함께 정트리오로서 미국과 유럽 무대에서 활약했다.
뉴욕 메네스 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한 그는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피아노부문 2위를 차지, 김포공항에서 시청에 이르는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던 주인공이다.
그러던 그는 79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상임지휘자로 있던 LA 필하모닉에서 본격적인 지휘자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으며, 유럽과 미국의 유수 오케스트라 및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 바톤을 휘두르며 지휘자로서 이름을 날려 왔다. 2000년부터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2005년 이후 서울시향의 음악감독 상임지휘자로 활약해 온 정명훈. 그런 그가 나이 환갑이 넘어 생애 처음 들려주는 피아노 음반을 냈다.
‘정명훈, 피아노’란 심플한 타이틀의 이 앨범은 둘째 아들의 권유로 독일의 명장 만프레드 아이허의 레이블 ECM을 통해 발매됐으며 지난달 나오자마자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음향 좋기로 이름난 베니스의 라 페니체 홀에서 녹음, 거장의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담았다는 이 음반은 정명훈이 선별한 10개 곡을 수록하고 있다.
둘째 손녀 루아(Lua, 달)에게 선물하는 드뷔시의 ‘달빛’, 그에게 지대한 음악적 영향을 미친 누나 정경화에게 바치는 쇼팽의 녹턴 C#단조, 큰 아들 결혼식에서 연주했던 슈베르트 ‘즉흥곡 G플랫 장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의 ‘가을노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아라베스크’,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까지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는 마에스트로가 지휘봉을 내려놓고 들려주는 고백과도 같은 이 음악들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순간에 함께 했던 반짝이는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