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강혜리 ㅣ 우리 할아버지

2014-06-1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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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 딸이신가 봐요~ 두 분이서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네요!” 어느 한 아주머니께서 나와 할아버지를 보시곤 말씀하셨다. 햇빛이 내리쬐던 어느 한 여름, 중학생이던 나는 모처럼 한국을 방문해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순댓국을 먹으러 가는 길에 올랐다. 워낙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던 나는 버스에 앞뒤 좌석에 앉고도 오손도손 얘기가 끊이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께서 말을 건네셨다. 그 말에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셨는지 껄껄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허허 아니에요. 우리 손녀딸이에요.” 나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그 아주머니가 버스에서 내리신 후에도 우리는 누가 들을 새라 “할아버지, 내가 할아버지 딸로 보이나 봐.”라고 소곤대며 하루 종일 키득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3대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껌딱지’라고 불릴 만큼 할아버지, 할머니와 가까웠다. 우리 집의 막내인 나를 항상 예뻐해 주셨고, 포동포동한 손발로 걷던, 뛰던 귀여워해 주셨다. 할머니도 계셨지만 그중 단연 최고는 할아버지였다. 맛있는 게 있으면 항상 나를 먼저 불러 입에 넣어 주셨고, 식사 후 매일 엄마가 타 드리던 커피를 남기신 후 남은 커피에 우유를 가득 채워 엄마 몰래 내게 커피우유를 만들어 주셨다. 내가 필요한 뭐든 뚝딱뚝딱 금세 만들어 주시던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척척박사였다. 가끔 아빠보다 할아버지를 더 따라서 아빠가 질투도 하셨지만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은 아무도 당해낼 수 없었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온 후에도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은 계속되었다. 매일 전화카드 번호를 외워 할아버지와 통화했다. 나는 학교에서 일어난 얘기, 할아버지는 운동 갔다 오신 얘기 등등 자잘한 얘기까지도 나눴다. 하지만 어느샌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공부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할아버지께 연락드리는 횟수가 적어졌다. 매일 하던 통화도 일주일에 한 번으로 바뀌었고, 할아버지랑 통화하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대학을 온 후로 좀 더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면서 단연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내가 10살이건, 20살이건 할아버지에게는 똑같은 손녀딸인데 뭐 얼마나 컸다고 연락을 덜 드렸을까… 앞으로라도 더 자주 연락을 드리며 여느 때와 같이 옆에서 재잘거리는 착한 손녀딸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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