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산문] 최 정 ㅣ 나이가 숫자에 불과 하다고?

2014-05-08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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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참 좋겠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남녀라는 성구별은 물론이거니와 젊은 이 늙은 이도 없고. 오랜 동안 천국을 그리워했다면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즈음에 컴퓨터라는 괴물이 하나 더 늘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천국은 바로 이곳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점점 더 는다. 우선 젊었을 때는 자알 사는 집에 초대 받아 자알 놀고 돌아오면서 공연히 사는 게 쓸쓸해 지는 때가 있었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산속의 드넓은 운동장 같은 집을 봐도 이웃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의 내집이 딱이다, 싶다.

고급차도 안부럽고 명품 가방도 눈에 뵈는 게 없는 나이 먹음의 무식한 고마움.

젊었을 때는 대체로 출세 한 이들이 근사해 보였다. 이제는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자기 자리에 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가 남자 여자를 떠나 근사해 뵌다.(그런데도 이 나이에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보고 함께 점심하자고 하면 달갑게 받아 주는데 남자에게 밥 먹자고 하면 내가 아직 그렇게 섹시한지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은데, 그게 아직 이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메세지겠지?) 암튼 그렇거나 말거나 이제는 좋아 하는 사람이 있어도 가까이 하고 싶어 안달을 하지 않고 그냥 맘 속에 묻어 두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나이 먹음의 고마움.


가끔 모이는 그룹이 있는데 홍보단장 차원에서 유난히 사진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인터넷이라는 첨단 기술을 통해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 그런데 그 옆에선 얼굴 늙은 거 다 나온다고 손사래를 치며 도망다니는 예쁜 할머니(아줌마?)들도 있다. 나도 한 때 젊었을 때는 사진찍는 것도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하고 누가 보내준다던 사진을 안 보내면 삐지기도 했는데 이젠 손자 찍는 용도 외의 사진기를 쓰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행여 누가 사진 찍자고 하면 활짝 웃기도 하고 손가락 두개를 쫘악 펴들고 킬킬 거리기도 한다. 세상에, 바쁜 이 세상에 누가 할일 없다고 내 사진을 들여다 볼것인가? 나이 먹음의 고마움.

어느 수도자의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 꽃다운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 갔는데 80 먹은 노 수도자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보며 일생을 오로지 수도의 길을 닦는다고 닦아서 결국 저렇게 되는 게 나의 훗날의 모습일까 싶어 한동안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 한다.

그러다가 그 분들이 다시 통회하고 또 시작하고, 또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겸손과 순명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원판불변의 법칙도 있지만 원판 엎그레이드 버젼도 가능한 게 인생이란다. 자기가 뭔줄 알고 으시대지만 너나 나나 수만년 인류의 역사 속에 하잘 것 없음은 마찬가지라는 것. 자신이 나이를 먹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깨닫지 못할이 진리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은데 이래도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시끄럽게 출렁이던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고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하나도 바쁠 것이 없는 지금. 다만 아직도 읽고 싶었으면서 읽지 못한 그 많은 책들,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리지 못했던 그 많은 이미지들이 지금도 눈앞에 아롱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쁘지는 않지만 허접스레 낭비할 시간만은 없다.

통일만이 대박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앞에는 나이먹음 이라는 대박이 두손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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