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주디 이 ㅣ 엠마오로 가는 길

2014-05-06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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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의 산책로를 ‘엠마오로 가는 길’이라 부른다. 스위스 화가 Robert Zund의 ‘엠마오로 가는 길’이라는 성화에서 보았던 풍경과 흡사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곳은 하늘 높이 유칼립투스 나무가 숲을 이루고 덩굴풀들이 휘감고 있어 제법 그윽해 보인다. 난 은퇴 후 바로 남가주에서 샌프란시스코 근교로 이사했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의 적응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또한, 은퇴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처럼 갑자기 허탈감을 느끼게 했고, 무엇으로부터 밀려난 듯 허망했다. 나는 낙심한 채 엠마오로 가는 길을 걸었다.

아침이면 높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햇빛이 금빛, 은빛 줄기로 내려오며 적당히 구불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름다운 길에 정들어 갔다. 때로는 살랑살랑 바람이 내 눈치를 보기도 하고 속보를 전하듯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도 만난다. 느닷없이 안개가 내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자연의 변화에도 길옆에 자리한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살면서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다 해도, 오늘 이같이 나도 무탈하게 이곳에 서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자연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 번도 자세히 눈여겨보지 못한 작은 풀들과 풀꽃들이 반짝이며, 크고 작은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가 갑자기 내 의식을 깨워 주는 듯 나는 이 자연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연의 싱싱한 생명력은 느슨해진 나의 모든 기관을 새롭게 조율해 주었다. 모든 꿈과 열정을 내려놓고 그저 터벅터벅 걷던 나는 어느새 새로운 것을 만나는 기쁨과 설렘으로 이 길을 걷게 되었다. 이제 나는 자연과 함께 꿈을 키우고 있다. 젊음의 꿈이 아니라 인생 이모작의 꿈을 가꾼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갈 길을 내다보기도 한다. 모든 것을 하려고도 않고, 소유하려고도 않으며, 한계를 인정하는 여유를 자연에서 배워 간다. 때로는 친구를 불러 함께 걸으며 내 동산인 듯 자랑도 한다. 책도 마음껏 읽고 이렇게 글도 쓰며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지금이 바로 내 생애에 황금기라는 것을 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 알려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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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로 그동안 남가주 CVS Pharmacy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은퇴하고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살고 있다. 요즘 독서와 특히 시를 사랑해 늦깎이 시인을 꿈꾸며 한국 문학인협회 회원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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