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간의 바다] 어수자 ㅣ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

2013-12-03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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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동안의 일터에서 벗어나 매해 이맘때쯤이면 겨울 동안에 해야 할 일들, 하고 싶은 일들로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다 지나가고 일터로 돌아갈 때쯤 돌이켜보면 제대로 이루어 놓은 일이 별로 없이 시간을 보냈다는 자책을 하기 일쑤다. 온갖 계획을 세울 때는 제법 신이 나기도 하고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열정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갈증으로 타는 목을 적시듯 동서남북으로 휘저으며 여행을 하고, 불로 태우고 휘고 구부리며 작업도 하고, 많은 공연장, 전시장을 돌아다니리라, 물론 산더미 같은 집안의 일들도 즐거이 수행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러나 한 두달이 지나면서부터 때론 게으름에 붙잡혀서, 때론 동기의 상실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안일하게 나머지 날들을 보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터로 돌아가는 봄이 될 즈음이면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그렇게 한해가 가는 것이다. 올해는 이 반복되는 습성을 고쳐보려 내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벌써 11월도 반 이상이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세는 것도 나의 다짐에 위배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참 어렵다. 계획도 없이 작정도 하지 않고 자연스레 되어지거나 하게 되는 일들만 한다는 것은. 몇일동안이야 좋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가고 싶을 때 가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겨우 이 삼일? 제일 먼저 속에서 아우성치는 놈은 죄책감이다.

그 뒤를 이어 두놈 세놈 줄줄이 튀어나와 여러명의 내가 투닥거리고 싸움질을 시작한다. 너 정말 너무 심한 거 아냐? 양심도 없지, 그렇게 놀기만 하다니… 불경기라고 다들 죽을 상인데… 그 성공한 사람 알지?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종일 일한대… 돈도 무지 벌었대… 부럽더라… 몇 백만불짜리 집에서 산대… 너 그 사람 알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돕는다든데… 가난한 아이들한테 책도 모아 보내고, 도서관도 세우고, 집도 지어준대… 너 대학 다닐 때 그 라이벌 있잖아? 그 애 지금 유명해졌어… 외국에서 개인전도 많이 열고 작품도 꽤 많이 팔린다더라. 각양각색의 말들로 내 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돈스럽고 복잡해진다. 이러다가 남들보다 뒤쳐져서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퇴보를 거듭하는 것은 아닐까, 안절부절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는 우리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온, 움직일수 없는 성경구절 같은 것이다.

어차피 사람 만나고 밖으로 활개치며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그런 것들을 안하는 일은 내겐 식은 죽 먹기인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한다는 데 대한 죄책감과 불안이 날 자유롭게 놔두질 않는다. 아무것도 안하기보다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은 자유를 얻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죄책감과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어 평안케 하는 일,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던가. 오랜 세뇌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싶어진다. 진정으로… 나는 나일 뿐이니 남과 비교하지 않으리라. 누가 뭐래도 마당에 내리는 햇볕을 쪼이며 온종일 졸고 앉아 있을 것이다. 어떤 누가 무얼하고 무엇이 되고 하는 일들은 그들에게만 가치가 있는 일일 뿐 내게 똑같은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므로… 그리고 귀를 열어 들을 것이다. 마음 속 요란스런 소리들 아래 잠잠히 고여있는 소리, 그 소리에 귀 기울여 움직이리라. 움직인다는 생각조차 없이… 그것이 진정 아무것도 안하기일테니까. 그래도 삶은 살아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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