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한경미 l 어느 노부부
2013-11-25 (월) 12:00:00
미국은 굳이 단풍 나들이를 가지 않아도 쉽게 가을 단풍을 즐길 수 있다. 주택가에도 나무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마다 유난히 아름다운 길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가로수가 유난히 아름다운 길이 있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봄이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면 무성한 잎들이 싱싱함을 뽐내고 가을이면 어느 유명한 가을산 못지않게 낙엽지는 산책로를 만들어 준다. 매일 운전하며 지나가기만 할 뿐, 저 길을 걷고 싶다는 희망만 가질 뿐, 정작 내려서 걸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 두손을 꼭 잡고 낙엽을 밟으며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어느 노부부를 보았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 한편의 명화였다.! 한여름의 풍성했던 잎들을 떨어뜨리며 한해를 마감하는 가로수의 모습이나 격정의 젊은 날을 보내고 희어진 머리와 굽어진 모습으로 변한 노부부의 모습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흐드러지게 떨어져 있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 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단풍진 낙엽이 아름답기도 했었지만 노부부의 지나온 삶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비록 아무런 연고도 없고 대화도 나눠보지 않았어도 잠시의 모습으로도 마음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며 걸어갈까? 자녀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까?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을까?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살고 싶다. 드러내지 않아도 성숙함이 묻어나오게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 내 속에 응어리지고 추한 모습들이 세월 속에서 저렇게 정화되고, 싱싱한 녹음의 여름을 뒤로하고 이제는 가야할 때를 알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겸손하게 살고 싶다. 두 손을 꼭 잡아 주며 서로 의지하며 걸아가는 저 노부부처럼 나도 한세월 온유하게 누군가의 의지가 되며 살고 싶다. 오늘 아침에 빗방울이 조금 떨어졌다. 벌써 겨울이 저만치 모퉁이에 온 것 같다. 비가 내리면 저 아름다운 단풍과 낙엽들이 젖은 낙엽으로 변한다. 그러기 전에, 비가 오기 전에, 차에서 내려 낙엽을 밟으며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