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 정찬열의 산티아고 순례길 2,000리
▶ ③론세스바예스에서 쭈비리까지/ 야고보 시신 실은 배 상징, 배낭에 조개 달고 순례 길가에 길게 이어진 돌담들… 알고 보니 공동묘지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났다. 함께 걸어갈 길동무 들이다.
마을이란 길들이 모여 사는 곳.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걷다보면 산티아고에 이를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4월28일)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있다. 누군가 불을 확 켠다. 5시30분. 일어나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밖에 나오니 바람결이 차다. 혼자서, 둘이서, 혹은 끼리끼리 길 따라 걸어가고 있다. 모두들 배낭 뒤에 조개껍질을 하나씩 매달았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성인이 스페인에서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서기 44년 순교를 당했다. 그의 제자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돌로 만든 배에 실어 강에 띄웠는데, 그 배가 산티아고 부근에 도착하게 된다. 배낭의 조개는 그때 성인을 싣고 온 배를 상징한다.
야고보 성인의 유해는 근처 야산에 매장되었다. 800년이 지난 9세기 초, 한 수도사가 별빛의 인도를 받아 무덤을 발견했고, 교황청의 고증을 거쳐 야고보의 무덤으로 인증된다. 그때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가톨릭 부흥을 위해 산티아고 성지순례를 장려한다. 그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stela),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한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이 길은 20세기 초 가톨릭 부흥운동의 하나인 ‘꾸르실료 운동’이 시작된 길이기도 하다. 개신교에서 이 제도를 차용하여 ‘트레스디아스’ 운동을 시작했다.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꾸르실리스타가 되던 날의 감격이 새롭다.
천 년 전, 어떤 분이 걸어갔던 길을 걸어간다. 숲 속에서 새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소리를 길게 뽑아 쓱꾹, 쑤욱꾹 말을 걸어오는 놈, 삐비 삐이삐비 자지러지게 고백하는 녀석… 천 년 전에도 저렇게 똑같은 소리로 길손을 불러 세웠지 않았을까.
앞서 가던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처럼 오늘도,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걷고 있다. 처음 이 길을 혼자 오려고 했었다.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자유가 아니던가. 마음껏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 혼자 사색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위해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직장에서 어렵게 휴가를 받아냈다. 이렇게 걸어보니 알겠다. 둘이서, 혹은 여럿이 오더라도 결국 혼자 걷게 된다는 것을. 각자의 길을 각자 걸어가는 것이다. 그 날의 목적지만 정해 놓으면 된다.
산 하나를 넘자 또 마을이 나온다.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걷다보면 산티아고에 이를 것이다. 마을이란 길들이 모여 사는 곳. 강줄기가 모여 호수를 이루듯,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고 나가는 곳. 그들을 위한 주막이 있는 곳, 그곳이 곧 마을이다.
길은 핏줄이며 동맥이다. 사람이 사는 곳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망이니까.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길을 잘 만들어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곳 스페인이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것도 바닷길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보면, 조선 숙종 때 평안도 관찰사가 길을 닦아야 한다고 했더니, 숙종은 ‘치도병가지대기(治道病家之大忌), 곧 ‘길 닦는 것은 병법에서 기피하는 일’이라 답하여 결국 길을 닦지 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대륙과 섬나라의 잦은 침공 때문에 길이 없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래가지고 나라가 번영할 수 있겠는가.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결국 길을 열지 않겠다는 잘 못된 판단이었다. 길이 열리면 나라가 흥하고, 길을 막으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길에 달려 있다. 나는 내 조국에 역사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나오길 고대한다. 막혀 있는 한반도 북녘 땅을 열어갈 수 있는 지도자, 그 길을 타고 대륙으로 힘차게 기운을 펼쳐나갈 혜안을 가진 리더. 아흔아홉을 양보하더라도 그 길 하나를 얻어내면, 바로 그 하나가 아흔아홉을 넘치게 채워줄 것임을 아는 선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것만이 우리 민족이 융성하는 길이므로.
모퉁이를 돌아서니 ‘Bar’가 보인다. 우리들 마을에 주막이 있듯이, 이곳은 ‘바’라고 부르는 곳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판다. 그리고 웬만큼 큰 마을에는 알베르게도 있어 순례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쉬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길가에 돌담이 길게 이어진다. 공동묘지다. 마을 사람들이 죽으면 이곳에 묻히는 모양이다.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동네에서 함께 살다가 죽어서도 저렇게 오순도순 모여 고향을 지키는 모양이다.
빗물에 씻겨간 길에 자갈이 드러나 있다. 숲은 햇빛이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울창하다. 길은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내 앞에 가는 여자의 차림이 좀 독특하다. 50대로 보이는데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제법 큰 가방을 앞뒤로 둘러맸다. 이름은 마리아, 홀랜드에서 왔다고 한다. 성악을 전공했다기에 노래를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빙긋이 웃는다. 순례길에 성악가의 노래를 들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아니겠냐고 했더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래를 시작한다. “마리아 마리아…” 청아한 목소리가 뜬금없이 산천에 울려 퍼진다. 앞서가던 순례자 몇이 뒤를 돌아본다. ‘Welcome to Sport Hall… 6-9’. 식당 안내문이 나무에 걸려 있다. 마을이 멀지 않았나 보다. 숲을 벗어나자 아담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 2시다.
알베르게에서 한참을 쉬었는데도 아직 해가 남아 있다. 마당에서 한국 젊은이들을 만났다. 반가웠다. 맥주나 한 잔 하자며 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여정을 마치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갈 길동무이다.
원가희, 정지은, 김나연, 그리고 파리에서 와인 공부를 하고 있다는 중국인 알렉스다. 가희는 대학졸업 후 신문사에 근무했는데 이 길을 걸으며 진로를 생각해 보겠다 했고, 지은이와 나연이는 학생인데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게 좋을지 이 길 위에서 결정하고 싶다고 한다. 기호승씨는 건축회사에 근무하는데 이 길을 걷기 위해 휴가를 받아 왔다고 했다. 이 길은 종교적 이유로 걷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이 되고 있다.
숙소 마당에서 원대한과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늦게 도착했는데 빈방이 없다며 강당에 매트리스를 깔아주었다고 한다. 찬바람 도는 넓은 강당 한쪽 바닥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우리 방에서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알베르게에 따라 침구를 주는 곳과 주지 않는 곳, 침대 시트를 주는 곳과 주지 않는 곳으로 구분되고, 그에 따라 값도 오르락내리락 한다.
내 방에 들어가 보니 침대 한 칸이 아직 비어 있다. 관리 착오인지 확인하려고 사무실에 가 보았는데 아무도 없다. 대한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라도 침대에서 주무시게 되어 다행이라고 아들이 좋아한다.
순례길 세 번째 밤이다. 어렴풋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가만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대한이 어머님이다. 아들이 잘 자나 살피고 오신다고 했다. 시간이 꽤 지나 잠결에 얼핏 들으니 또 나가시는 모양이다. 두 번씩 일어나 아들 잠자리를 살펴보고 오시는 어머니. 다 큰 아들이지만 어미의 눈에는 보살펴 줘야할 아기일 뿐이다.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