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김미정(챌리스보컬 앙상블 디렉터) ㅣ 김치 왕만두

2013-11-0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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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다. 잡곡밥 권장령 때문에 엄마들은 쌀밥 위에 보리를 살짝 얹어주는 눈가리고 아웅을 하기 시작했고 때론 밥밑에 계란후라이를 깔아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했다. 우리는 도시락을 까면서 더 맛있는 반찬을 가져온 친구 옆에 은근히 앉아주는 눈치도 생겼다. 그중 내가 제일 옆에 앉고 싶어했던 친구가 있었다. 거의 매일 김치찌개를 조그만 병에 담아오고 때로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김치 왕만두를 싸오는데 식어빠진 그 만두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걸 먹으려고 계란후라이가 깔린 밥도 소시지 반찬도 서슴지않고 바꾸곤 했다.

어느날 그애가 자기집에 놀러가자 했다. 영동시장 건너편으로 이리저리 골목길을 돌아서니 콘크리트벽에 철문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걸 열면 입구에 공동화장실이 하나 있는 긴 복도가 있고, 그 복도를 끼고 또 여러 개의철문들이 있는 거다. 그 철문 중 하나가 친구네 집이라 했다. 문을 열자마자 있는 앞으로 옆으로 뒤로 한걸음이면 되는 작디작은 부엌. 그 부엌머리에 매달려 있는 줄을 당기면 조그만 사다리가 내려오고, 그위로 기어올라가면 그애 언니가 생활하는 설 수도 없이 낮은 다락이 나왔다.하나밖에 없는 방은 얼마나 작은지 그집 식구 다섯이 어떻게 누워 잘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김이 폴폴 나는 노란 들통을 여니 김치 왕만두가 담겨 있었다. 일하고 늦게 들어오는 그애 엄마가 지쳐서 대충 빚은, 돈이 없어 두부와 김치만 넣은 그 초라한 왕만두. 내게는 너무나 맛있고 특별한 그 만두가 그들에게는 벗어나기 힘든 가난을 증명하는 눈물나는 음식이었던거다. 화려한 강남의 바로 그 뒷길에 이런 생활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때의 어린 나이에도 가슴 저리는 충격이었다…습관처럼 냉장고를 정리하며 상해버린 음식들을 무심코 버리다 아차 싶었다. 냉장고와 팬트리를 채우고도 모자라 거라지에 냉장고를 하나 더 놓을까를 고민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아마 냉장고보다 내가 먼저 줄여야 할 것은 나의 욕심이고 허영이며, 태만이고 늘어나는 뱃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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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전문경영인의 꿈을 키우다가 1992년 도미했다. 산호세 주립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고, 퍼시픽 콰이어 단장을 역임한 후 현재 챌리스 보컬 앙상블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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