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윤혜석 ㅣ 중얼거리며 뒤돌아보는 ...
2013-11-01 (금) 12:00:00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지가 하마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을 보냈지만 워낙 넓은 땅덩어리여서인가 낯선 구석이 많다. 그런 이유인지 이전 같으면 충분히 감상에 젖을 만한 상황이어도 탄성을 지른다던가, 혹은 눈물이 난다던가 하는 멜랑꼬리에 전혀 빠지지가 않는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그 광대한 자연에서나 끝없이 삭막한 사막으로 가는 휑한 포도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술렁이게 할만한 시가 되지 않는다.
미국 온 지 15년이 바람처럼 지나버렸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떠난 한국을 큰 사명이라도 짊어진 양 홀로 남아 20년을 버티던 한국을, 모두가 떠나도 나만은 남아야 될 이유가 수백 가지는 넘는다며 머물렀던 한국을 등지고 먼 미국에서 흘러보낸 세월이 벌써 이만큼이나 지나고만 것이다.
계절 탓인가. 푸른 빛 깊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 바람소리, 밤이면 살갗을 파고드는 스산함, 저무는 날들의 실상들을 바라보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중얼거리며 뒤돌아보는 나를 본다. 살아갈 날들 보다는 살아온 날들이 나를 잡아끌고 있는듯 어느새 또 살아온 날을 중얼거리고 있다. 문득 저물어 가는 날들에 나를 그냥 내어맡기기 싫어 몸과 마음을 추스려 본다. 시를 떠올리고 십년 후 이십년 후의 모습을 가늠해 보고 쏜 화살처럼 날아가는 세월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나름 계획도 세워보자 벼르며 혼자 가을 속으로 여행도 다녀온다.
온통 맑은 것뿐인 캐나다의 록키는 투명하게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호수도 산도 하늘도 말갛게 속을 다 비워낸 자연의 그 맑음을 닮고 싶었다. 마른 잎사귀에 보태지는 가을빛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단풍 속에 빠져들 때는 내게 남은 것들도 빛이기를 바래보았다.이제사 시간이 없다는 투정 안 부리고, 살기가 고단하다는 어리광 끝내고, 긴 숨 내쉬며 팔짱끼고 느긋한 걸음 내딛는 나이가 되었지만 내일도 팔짱끼고 느긋하게 길모퉁이 돌아 내 집 앞에만 맴돌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하라 한다. 이곳에서 또 저곳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며 살라 한다. 지난날을 동무 삼으면 절대 내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