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윤혜석 l 기억하는 것과 잊혀지는 것들

2013-10-11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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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름를 가진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을 보고 왔다. 곱디 고운 목소리, 맑고 환한 얼굴로 노래하는 아이들의 공연은 감동적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들과 마주 앉았는데 불현듯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어린이 합창단에 가입시키려 오디션을 봤던 기억이었다. 이것 저것 생각들의 연결이 자꾸 어긋나기에 그 날들의 일을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런 기억도 없지만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단호히 말을 잘랐다. 그 때 생각들이 갑자기 엉키어들면서 흐릿한 장면들이 서로 엇갈려 날라다니기 시작했다. 아들이 아니라 막내 남동생을 오디션 뵈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둘의 나이는 스무살이나마 차이가 나는데...

얼마 전, 친구의 집에서의 일이다. 잘 정돈된 부엌 쪽 높은 선반 위에서 탐스럽게 자란 화분 두개가 양옆으로 싱싱한 잎을 드리우며 푸른 기운을 온 집안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한참을 칭찬 겸 소감을 늘어놓았다. 그 때 어이없는 목소리로 터질듯 친구가 하는 말, “그거 네가 우리 이사할 때 사다준 것 아니니! 두개 가져다주면서 양쪽으로 올려놓고 정답게 잘 키워보라더니...”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지고 화분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어떤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과 1, 2년이 지난 일일 뿐인데 말이다.

아직도 나는 기억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잊혀지지 않아서 마음을 휘젖어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아서는 바람에 잊고자 기를 쓰고 있다고 여겨왔었다. 잊고 싶은 기억은 늘 곁을 떠나지 않는데 기억하고 싶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은 금새 잊혀지고 있다. 터무니없음과 서글픈 마음이 이리저리 어긋나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어린 시절 다정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지워지고 그들과 웃으며 떠들고 놀던 골목길이 정감은 헐리고 뜯겨진 폐허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은 가슴을 뚫고 휘돌아나가는 한 줄기 바람되어 내게서 멀어지고 만다.

머리 속 쫌쫌히 너무 깊어서 배어나오지 못하는 기억들... 무엇으로 그 깊은 속을 파내어 그날의 일들을 살아나여 잊고 싶은 기억을 덮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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