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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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자폐아 양육기 발달장애가 맺어준 특별한 학생들

2013-10-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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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희 교사(언어기술아카데미(ALT)교사/한국자폐인사랑협회 자문위원)

고등학교 교사인 나의 직업병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교실 안팎에서 만났던 학생들과의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빚어나가는 시기였기에 그 시기의 모든 경험들은 하나하나가 나중에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나갈 토대가 될 것이고 따라서 내가 그들과 교류하던 그 순간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들의 삶에 나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기에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 나이의 학생들을 대할 때 나는 내 말 한마디가 더 조심스럽고 특별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 때는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이 겪어가는 경험들이 이후 어떻게 그들의 삶에 반영될지 그려보게 되곤 한다. 발달장애(자폐)가 있는 에반이를 통해 특히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알게 되어 나는 참 감사하다.

수업 중에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 상당히 조용한 남학생이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사회 수업의 특성상 토론이 많이 들어가는데 도무지 토론에 참가할 의향도 없어 보이고 해서 따로 토론 수업의 중요성을 말해 주곤 해도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숙제를 해오거나 시험 성적을 보면 상당히 우수해서 토론의 주제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도 그는 말을 아꼈다.


어느 금요일에 수업을 마치면서 학생들의 일요일 계획 등을 물어보고 나의 계획을 물어보기에 지나가듯 나는 아들이 있는데 발달장애가 있어서 그에 대한 인식 개선의 하나로 달리기를 할 거라고 했다.(나는 몇 년 전부터 달리기를 통해 발달장애를 알리는 인식 개선 운동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잘 달리라며 지나가듯 말을 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방과 후에 나를 찾아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와 함께 뛰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조리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은 5세가 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부모님이 많이 걱정을 했단다. 아직도 사람들과 눈 맞춤을 하며 말을 하는 것이 편하지 않지만 많이 노력 중이라고. 선생님의 아들과 자신과는 다른 케이스일수도 있으나 가끔 자신이 발달장애가 있는 건인지 생각해보기도 한단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선생님과 달리고 싶다며 오히려 의젓하게 나를 위로하듯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나를 찾아와 말을 했던 그 5분간은 수업시간에서 빛나게 토론을 이끌어가던 여느 학생들과 뒤질 바 없는 멋진 연설로 기억된다. 또한 그 학생과 즐겁게 달렸던 나의 첫 자폐 인식을 위한 달리기 대회는 아직도 오래도록 기억이 남는다.

에반이가 참여했던 장애아들을 위한 농구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여학생도 잊을 수 없다. 그 프로그램은 많은 일반 고등학생들이 장애아 학생들의 ‘짝꿍’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짝꿍’이 되면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참가자들에 한해서는 팀을 만들어 자유롭게 농구를 하는가 하면 에반이와 같이 그 장애 정도가 심하면 한 고등학생 짝꿍이 전담이 되어 장애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몇몇 짝꿍들은 소위 말하는 봉사활동의 시간을 채우러 오는지 일주일에 한번 있는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자주 보기가 힘들었고 에반이와 짝꿍이 된 한 여학생 또한 나는 처음에 얼마 가지 못할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음을 인정해야겠다.

말로써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에반이기에 에반이의 반응을 제대로 끌어내려면 발달장애아와 오랜 시간을 있어봐야 하는데 처음 에반이를 만난 그 여학생이 에반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힘들어 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에반이가 발달장애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주고 말로써 복잡하게 농구 테크닉을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보여주면서 그 테크닉 설명 과정을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알려주되 한 테크닉을 계속해서 반복한 후 다른 테크닉으로 넘어가자는 제안을 했다.
발달장애아들에게 많이 쓰는 ABA(Applied Behavior Analysis) 교육 테크닉을 나름대로 간략하게 알려주면서도 그가 과연 관심이 있어 할까 했는데 그는 나의 이야기를 의외로 상당히 재미있게 듣는가 싶더니 사실 대학교에 진학하면 심리학을 전공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우연히 에반이를 통해 발달장애라는 분야를 알게 되서 좋다고 하더니 매주 성실하게 나와 에반이의 ‘짝꿍’으로 프로그램 처음부터 끝까지 농구를 같이 했다.


프로그램이 종결에 다가올 때 쯤 그 여학생은 처음과는 달리 에반이의 눈 맞춤을 적절히 이끌어내는 것부터 서로 공을 주고받으며 그 사이에 발달장애를 이해하는 데 여간 발전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발달장애 분야에 흥미를 보이고 더욱더 배우려고 하는 그는 발달장애 특수학교에 다니는 에반이의 학교에서 여름방학동안 보조교사로 일하며 그 경험의 폭을 더욱더 넓혀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한인 남학생이 에반이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쳐준 것을 언급해야겠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물놀이를 배워 이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급인 학생이다. 에반이의 장애를 아는 그는 에반이에게 한국 전통악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그 남학생은 무거운 북 두 개를 멀리서부터 택시까지 타고 와서 에반이가 다니는 발달장애아를 위한 오후 프로그램에 날라다오고 방학 내내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와서 에반이 뿐이 아닌 다른 발달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북을 가르쳤다. 발달장애 학생들에게는 그 북의 음감이 부드럽게 느껴져서일까 북을 다룰 때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음악을 가르치는 그 학생 또한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인격적으로 대해야할지를 겸허하게 배워가는 듯 한결 같이 그 수업을 이끌어나가는데 충실했고 고등학생 나이 또래 특유의 유머도 잃지 않아 수업에 웃음이 언제가 가득했다.

시간이 흘러서 이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을 당당하게 이끌어가는 건강한 한 사회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나와 에반이를 통해 빚어졌던 경험들이 어떻게든 그들에게 기억이 될 거라 믿는다. 그들은 수십 년 후 어쩌면 에반이와 같은 발달장애인에 관련된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작은 학창 시절의 경험을 통해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발달장애인 특유의 상동행동-반복적인 소리를 계속 낸다거나 몸을 반복적으로 까딱이는 모습 등-을 보이는 사람들을 길에서 우연히 보았을 때 얼굴을 찌푸리기보다는 따뜻한 눈길로 조용히 바라봐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나이를 먹어 가는데도 여전히 그러한 아이들이 좋고 그래서 아직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는 어쩔 수 없는 철없는 교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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