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윤혜석 ㅣ거북아, 거북아

2013-09-20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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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 눈뜨고 일어나 보면 그새 내가 모르는 것들로 세상은 넘쳐나고 그걸 쫓으려 허둥대며 따라가 보지만 그 걸음은 발목에 젖은 모래주머니라도 달고 있는 듯 무거워 멈춰서고 주저앉게 된다. 손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편리함의 결정체, 전화기 하나도 그 기능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세대를 살고 있다.

그런 일상에 허둥대다 지친 날에는 세상을 향해 까닭없는 시위라도 하는 양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게으름을 피워본다. 해는 하늘 한가운데까지 밀고 올라왔지만 뒤척이며 짐짓 눈 감고 이불 속으로 기어든다. 세상이 뭐라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딴나라 얘기라 하며 어깃장을 부려본다.

오후가 되면서 유혹하는 빛이 스며들어 녹지근 게으름으로 데워진 자리를 슬그머니 물리치게 한다. 변명처럼 들려오는 말이 들린다. “세상은 버려 두고 그 속의 인간도 지나쳐서, 들판으로 나가라.”


객이 없는 필드, 하늘과 땅을 싸잡아 내 것인 들판을 방해없이 달리는 바퀴 앞에 거뭇한 것이 누워 있다. 급하게 멈춰서 보니 큼직한 거북이 한 마리. 떠나온 호수가 바로 저기 눈앞인데 길을 잃고 엉거주춤 맴돌고 있는 거북이였다. 길게 뺀 목을 스르륵 몸 속으로 밀어넣고 움쩍도 않는다. 두꺼운 등가죽으로 두려움없음을 가장하고 버티고 있다. 눈도 까딱 않고 능청을 떤다. “나도 너처럼 한가한 오후를 즐기는 거야, 여유롭게.” 무표정하게 날더러 그냥 모른 척 가란다.

호수와는 정반대 쪽으로 기어가던 녀석의 무모한 허세가 혀를 차게 한다. 가엾음도 어이없어 기가 막히는데 희뜩거리며 바람이 불어와 익숙한 얼굴을 거북의 두꺼운 등가죽 위로 겹쳐 놓는다. 오늘은 쉽게 포기해 버리고 내일은 고개 돌려 모른 채 지나가려는 파리한 내 얼굴. 그때 빠르게 바람 한 줄기가 뒷목을 치고 달아난다.

거북이를 들어 물냄새, 물소리 아주 가까운 곳에 내려놓는다. “어리석어서 가여운 짐승으로 남지 말고 네 있을 곳을 벗어나지 말아라.” 등을 토닥여준다. “네가 사는 곳을 기뻐하렴. 벗어나고자 멀리 눈뜨지 말아라. 호수로 돌아가렴. 네가 다시 찾는 호수에서 나는 내가 살던 나의 호수를 오늘 찾는다. 거북아, 거북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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