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필산책] 주평(아동극작가) l 편지 (1)

2013-09-04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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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달력 한 장이 뚝 떨어 지니, 9월이란 꼬부랑 글자가 얼굴을 내민다.내가 사는 이곳 북미주(Northern California)의 4계절의 변화는 뚜렷하지 않지만, 그래도 계절의 술래바퀴는 돌아 가고 있는 듯, 새벽 저녁으로 불어 오는 초가을의 산들바람이, 이 늙은 것의 까칠한 빰을 서치고 지나 간다. 가을에는 멀리 떠났던 정다운 사람이 꼭 돌아 올 것만 같은 계절이다. 기다렸던 그 사람이 찾아 와 주지는 않아도, 편지 한 장은 보내 올것만 같은 계절이다.

편지! 요즈음 세대는 잘 모를게다.세월이 반세기나 거슬러 올라 간 지난 날, 우리들의 보통(일반적인) 아버지들이, 타관(도회지)으로 공부하러간 자식에게 보냈던 편지, ‘아들아, 몸 성히 잘 있느냐?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조석(밥)은 잘 챙겨 먹느냐? 계절이 바뀌는 이 절기에 감기 들지 않도록 부디 조심하거라!’ 라는 내용을,줄이 처진 색바랜 편지지 위에, 달팽이가 파란 잎사귀 위에다 찐득찐득한 첨액의 선을 남기고 지나 갔듯, 꾸불꾸불 하게 써서 보낸 그 편지는, 달팽이가 잎새 위에 긋고 간, 그 첨액의 흰줄 만큼이나 찐득한 ‘정’이 서려 있는 사연의 편지가 아니 었던가?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 오는, 우리 나라에서의 편지(便紙)에 대한 개념은, 한자가 말해 주듯이, 어디 까지나 종이에 쓴 안부의 글을 보낸다는 뜻이 아니 었던가?! 그리고 우리 나라와 유사문화를 공유하면서 살고 있는 일본에서도, 편지를 데가미(手紙)라고 부르고 있다.이말은 곧 우리 나라처럼,종이(편지지)에다 글짜를 손수 써서 보낸다는 뜻이다.그 뿐인가, 심지어 우리와는 문화 패턴이 다른 미국에서도, 편지를 레터(Letter)다시 말해서, 사람이 손수 쓰는 글자란 뜻이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이 손수 써서 보내는 ‘손편지’에 대한 고유의 개념과 형태는 사라져 가고,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기계로 찍어낸, 글이라기 보다는 활자 개념의 기호를 전송하는, 전자편지(E-mail)란 ‘기계편지’ 형태로 바꿔 가고있다. 그래서 편지의 원조(元祖)인 손편지는 이제, 안방 구석으로 밀려난 냄새 나는 영감 신세로 전략해 가고 있다.그리고 손편지의 몰락은, 많은 우체국의 문을 닫게 하였고, 그로 인해 철갑직업으로 간주되어 왔던 우체부들을 비롯한 우체국 직원들의 밥통을 앗아갔고, 또 앗아가고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컴퓨터와 인연을 맺지 못한 나는, 지금도 손수 쓴 손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촌스럽게도 펜으로 원고지 칸을 매우고 있다. 여기에 지난 날에 내가 쓴 편지에 얽힌 웃지 못할, 한 사연과, 월남전이 한창일 때 내가 쓴 ‘편지’란 제목의 동극에 관한 이야기가 먼 세월의 담을 넘어, 뾰죽히 얼굴을 내민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내가 중학 3학년 때인 이른 봄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 와 집 대문을 들어 서자, 때 늦은 점심상을 마주 하고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 보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예사롭지 않는 두 분의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엉덩이를 부비대고 밥상 모서리에 끼어 앉았다. 그 때 아버지가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어 놓으시며 “이놈아 자식아, 대갈통에 소(쇠)똥도 안 배껴진 놈이, 벌써 연애질이가?“라며 나를 노려 보셨다.

아버지가 내민 편지는, 며칠 전 내가 통영여중 2학년생인 ‘하세가와 미애(長谷川 美江)’에게 주려든 연애편지(Love Letter)였다. 이어 아버지와 나의 연극 대화 같은 말이 이어져 갔다. “이름을 보니까 일본 가스나 같은데, 맞제?” “맞습니더” “즈거 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이고?” “ 아버지 어업조합 건너편에 있는 폰데목(해저턴널)감시소 소장입니더” “아, 그 하세가와 소장 딸이구나. 그런데 가(그애)에게 줄라고 쓴 편진데, 와(왜)주지 않고, 책상 속에 처박아 났(놓아)노?” “주었습니더!” “아니,주었다는 편지가 와 니(너)책상 설합 속에 그대로 있노?” “주었는데 안 받겠다고 땅바닥에 떤지(던져)버리기에, 도로 줏어 가지고 왔습니더” 나의 도로 줏어 가지고 왔다는 대답을 들어시자, 아버지는 편지를 밥상 위에 던져 버리시고는 “에이 못난 놈, 채였구먼!” 라고 하시며, 마치 아버지 자신이 실연(失戀)당한 사람처럼,벌떡 일어 나 대문 밖으로 총총이 나가 버리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나에게 “야야, 너는 조선 애들 다 두고, 우짜자고(왜) 일본 가스나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노?” “참 예쁨니더!” 라는 내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흥, 그 애비에 그 자식이지, 지 애비도 일본 가스나...” 라고 말 하고는 참아 자식 앞에서 라는 생각이 드셨든지, 말꼬리를 흐리고 마셨다. 어머니가 이러한 볼맨 소리를 한데는 까닭이 있었다.

내가 4살 때인 그러니까 아버지가 진해(鎭海) 어업조합 서기 시절에, 정구(테니스)장에서 만난, 일본 아가씨와 어머니 몰래 가깝게 사김으로써, 어머니의 속을 크게 상하게 했던, 그 때의 앙금이 되살아 났기 때문에서 였다. 어쨌든 그 날 아버지께서 크게 마음을 상한 모습으로, 집 밖으로 달려 나가신건, 나의 유치한 추리인지는 몰라도, 그 지위로 보아 감시소 소장 보다는, 그 직위단계가 위인 어업조합 이사 아들이, 감시소 소장의 딸인 일본 가스나에게서 수모를 당한데 대한 분함의 표출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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