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윤혜석 ㅣ 내 이름은 Julie

2013-08-30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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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미국에 새 둥지를 틀 무렵의 일이다. 그 시절, 미국에서의 날은 아득하고 두려웠지만 아득함 속에서도 다행인 것은 가족들이 전부 이곳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어 내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까닭이다. 한걸음씩 나아갈 때 내 손을 잡아 준 부모님, 형제들... 남동생이 college에서 cafeteria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학교에서 나는 ESL 수업을 받으며 얼마간의 시간은 동생의 카페테리아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규모가 큰 학교의 카페테리아인 만큼 같이 일하는 직원도 많았다.

이 일을 하면서 한 가지 애로에 부딪혔다. 호칭이었다. 동생이 나를 부를 때는 ‘누나’, 올케는 ‘형님’, 한국인 직원들 중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이는 ‘언니’, 어린 아르바이트 학생은 조카들이 나를 부르듯 ‘고모’, 같은 교회에 다니던 이는 ‘집사님’.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름이. 당연히 혼란스러운 건 같이 일하던 멕시칸과 월남사람들이었다. 몇번이고 이름을 가르쳐 주었지만 발음을 너무 어려워했다. 바쁜 와중에도 내 옆에까지 와서 툭, 치면서 어색한 발음으로 ‘혜’를 부르곤 했다.

보다 못한 동생이 영어 이름을 짓기를 권했다. 그러고보니 형제들은 물론이요 많은 한국인들이 영어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 즈음에 영어공부 삼아 영화를 하나 보았다.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개봉을 했던 청소년공포 영화였다.


큰 감동을 준 영화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큰 의미로 아직 남아 있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었던 Julie가 내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까닭이다. 여주인공을 맡았던 Jennifer Love Hewitt은 이쁘기도 했지만 영화 속에서 지혜로웠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죽는 결말까지 홀로 살아남았던 게 이유다.

늦은 나이에 남의 나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내게 살아남는다는 건 이름을 걸어야 할 만큼 큼지막한 이유가 아닐 수 없었다. 시작하는 일이 아득하고 두려웠던 그 시절, 하나 둘 스러져가던 영화 속의 인물들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한 사람, Julie. 오늘 나는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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