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최형심 ㅣ 문학속의 사랑 2

2013-07-26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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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환영과도 같았다." 이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 청년 프레데릭이 아르누 부인을 처음 본 순간을 표현한 첫 문장이다. "그는 그토록 밤색으로 빛나는 피부와 유혹적인 허리와 빛이 지나가는 정교한 손가락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바느질 바구니를 마치 무슨 비상한 물건이나 되듯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그는 그녀의 침실에 있는 가구들과 그녀가 입었던 모든 드레스들과 그녀가 자주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사랑할 대상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이같이 빼어난 감각으로 그려져 있지만 사랑은 주인공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방 출신의 프레데릭에게 사랑의 부피는 빠리의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에 대한 동경과, 가질 수 없는 여인에 대한 환상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 정교한 문체의 음영을 통해 드러난다. 대부분의 현대 소설에서는 이처럼 사랑에 대한 감수성은 있으나 ‘사랑’은 없다.

그러나 앞 글에서 언급한,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은 몇 세기를 뛰어넘어 ‘사랑의 전형’을 상기시키는 주옥 같은 예이며 독자를 시대착오적 혼란에 잠시 빠뜨린다. 중세 음유시인들에 의해 전해진 ‘트리스탕과 이죄’에 견줄 만큼 죽음보다 강한 운명적인 사랑의 막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Denis de Rougemont은 그의 ‘Love in the Western World’에서 서구의 ‘낭만적 사랑’의 전형을, 12세기의 ‘트리스탕과 이죄’ 이야기에서 찾는 탁월한 관점을 제시한다. 젊은 기사 트리스탕과 숙모인 금발의 이죄가 실수로 ‘사랑의 묘약’을 마신 후 제어할 수 없이 거센 운명적 사랑의 불길에 휩싸이는 애절한 이 이야기는 두 연인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난다.
이는 단순한 정염의 이야기가 아니며, 중세 교회의 정혼제도, 인습에 전적으로 매여 있던 인간이 봉건제도가 해체되기 시작함과 함께 더 이상 ‘익명’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자아’에 눈을 뜨고 최초로 남녀의 정열을 경험하는 현상이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회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트리스탕의 정열은, 개인적 주체의 탄생과 자아의식에서 나온 욕망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유일회적 사랑,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이란,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할 인생의 다른 염원들처럼 결코 허상이 아닌 확실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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