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희봉 칼럼] 연어를 기다리며

2013-05-14 (화) 12:00:00
크게 작게
올핸 숫제 봄을 만나지 못했다. 앞마당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설핏 본 듯도 한데 한밤 자고 나니 바람결에 다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밤새 내린 비에 다 씻겨갔는지도 모른다. 봄은 사랑의 징표도, 그리움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나고 말았다. 분주한 일상에 넋 놓고 살아가는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놓친 셈이다.

"참 세월 빠르지요. 꽃 피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문득 고개 들었더니 서른이었고, 나무아래 아이들이랑 살구 줍다가 일어섰더니 마흔이었고, 날리는 꽃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쉰이었습니다.." 라고 읊은 섬진강 김용택 시인의 노래가 내 고백이 되었다.

"김형, 늦봄 보내러 산에 가지 않겠소? 산에 올라 흐르는 내에 발 담그고, 나무숲 솔향에 취해보면 세월 흐르는 소리가 사각사각 납니다. 떠나가는 봄 마중도 않고 어찌 무심히 나이만 먹겠소? 이젠 우리도 가는 세월 자락마다 감사의 노래를 한아름 꽃다발로 엮어 안겨 보내야 할 때가 되었소".


K선배님의 전갈이 고맙다. 자연을 좋아해 수시로 산행하며, 바다나 강 낚시를 즐기시는 두 내외가 내 마음을 아셨는지 동행하길 권하신다. 숲 속에 하루 밤 야영할 채비를 다 해 놓았으니 몸만 왔다가라고 하신다. 격의 없고 밝은 인품 때문에 마음이 시릴 때마다 연락 드리면 넉넉하게 감싸주신다. 어떤 불행도 잘 타일러 행복으로 바꿀 만큼 긍정적인 사고와 실천력의 소유자이신 선배님께 등을 기댈 수 있는 게 감사하기 그지없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고개 넘어 바로 태평양 바다이고, 도시를 벗어난 게 얼마 안 되는데 이렇게 깊은 숲이 있는 줄 몰랐다. 봄을 보내는 숲은 꽃들이 분분히 흩날리고 초록빛 잎사귀들이 더욱 촉촉해져간다. 군데군데 레드우드 나무가족들이 오랜 옛날 어미나무가 있었던 가운데 빈 자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 서있다. 마치 손을 맞잡고 서서 기도하는 경건한 수도승들 같기도 하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내가 졸졸 흐른다. 지난주 내린 비로 물이 제법 불었다. "이 내는 이 맘때 바다에서 연어가 올라오는 모천(母川)이라오. 코호(coho)도 있고, 제일 작은 핑크 종(種)도 있지요. 매년 숫자가 줄어 안타깝지만, 연어의 귀천을 보러 이곳에 옵니다".

모천에서 부화한 치어들은 바다로 내려간다. 한 어미가 낳은 수천, 수만 개 알에서 살아남는 건 고작 열 마리도 안 된다고 한다. 수명이 4-5년 되는 성어들은 알래스카까지 천 마일을 헤엄칠 만큼 강하다. 산란 때면, 신통하게도 모천을 찾아 올라온다.

"김형, 연어들이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오는 지 아시오? 냄새로 안다오. 소위 후각기억장치가 유전자 속에 녹아있다는 게요. 내 아들녀석도 부모 품 냄새를 맡고 올라오고 있을 게요. 그놈도 연어처럼 큰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인한 효자였으니까.."

지난 봄, 뜻하지 않게 산악자전거사고로 세상 뜬 큰아드님을 그리워하는 말씀에 마음이 저민다. 아버지를 닮아 아웃도어 스포츠에 만능인 젊은이였는데 비오는 날 미끄러운 바위에서 순식간에 당한 사고가 아직도 악몽처럼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갓 40인 건장한 아들을 잃은 참척(慘慽)의 슬픔을 당하셨음에도 주어진 삶을 매일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그 의연함이 존경스럽다. 나도 아비이지만 아버지의 모습이란 저렇게 숭고한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사랑하는 아들은 내 가슴에 살아 있소. 함께 살았던 세월들도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소. 연어가 고향으로 올라오듯, 아들도 이렇게 비오는 늦봄이면 나를 찾아옵니다. 연어를 기다림은 아들을 기다림이지요. 그 녀석은 틀림없이 어미의 젖냄새, 아비의 땀냄새를 맡고 열심히 헤엄쳐 올 테니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향기로운 봄내를 연어들을 기다리는 냇가에서 종일 벅찬 가슴으로 맡고 있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