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거행된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이 친구와의 인연은 40년 전에 시작됐다. 우리는 대전 근교에 위치한 공군훈련소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애환을 나눴고, 기상예보라는 희귀한 특기교육도 같이 받았다.
그 후 그는 중견 기업체의 대표직에서 은퇴한 후 외동딸이 살고 있는 뉴욕에 거주해 왔었다. 그가 췌장암에 걸렸다고 알려온 것이 겨우 석달 전이라 그의 별세는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장례식은 애잔하고 비통했다.
특히 8살짜리 손녀가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읽을 때는 많은 조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 3월에 디즈니 월드에 같이 가자고 한 약속은 이제 어떻게 되나요?” 라고 묻는 어린 손녀의 순진한 질문은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1분마다 100여 명씩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 죽음들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 죽음이라는 실체가 우리에게 진지하게 느껴질 때는 자기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의 빈소에 가서 일 것이다.
우리는 빈소에 가서 고인의 인생에 대한 스토리를 듣고, 그의 인생이 성공이었느냐 아니었느냐를 떠나 그의 삶의 무게가 간단치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고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새삼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신의 남은 삶을 보람 있게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성찰도 잠시뿐, 바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치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은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옛날 아테네의 현인들은 제자들을 교육할 때, 일년에 한번은 관에 들어가 눕게 하며 항상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자세로 살아가게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은 없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지구촌은 얼마나 삶이 힘든 곳이 될 것인가. 또한 최고령기에 몸이 아파 고생하면서도 죽음을 맞지 못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요 저주일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방문한 친구로 부터 자기 어머니의 삶의 마지막 소식을 들었다. 83세로 삶을 마감하신 고인은 마지막 며칠 스스로의 결단으로 곡기를 끊으셨다고 한다. 암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는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자녀들이 애타하며 힘들어 하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의 과정을 줄이신 것이다.
그 친구는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불가사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쓴 작가 헤밍웨이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절규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분이다. 어떤 친구의 죽음도 나를 작아지게 하나니, 이는 또한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그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