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 이야기
2013-01-22 (화) 12:00:00
일본 식민지 시대, 세계 2차 대전 말엽 때 일이다.
한 사람 앞에 식량배급이 하루에 쌀 일홉 오작, 태반 부족이었다. 매일 배가 고프고 그나마 썩은 콩 깻묵을(일본 군마(軍馬)들이 먹는 식량이라 했음) 식량배급으로 보태 주는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썩은 콩 깻묵은 굶었으면 굶었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극도로 배가 고프던 때 소문이 돌았다. 그때 모집하고 있는 군속으로 가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나 일본 인들이 미군과 격전을 하고 있는 남양 어떤 전쟁터에 가면, 여유 있는 식량배급을 받을 수 있고 그뿐 아니라, 뒤에 남은 식구들 전체의 생활을 보장하며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굶주린 우리들에게 식량 배급을 많이 준다는데 큰 관심이 쏠렸다. 예외 없이 우리 집도 온 식구가 허기진 상태였다. 군속(정신대)으로 가는 것이 처음에는 자원하는 형식으로 시작했으나 곧 징집상태로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또 이미 결혼한 사람이나 의학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은 정신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 나 돌았다. 내 친구 하나는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버렸다. 그 아버지가 자기 딸 정신대 보내지 않기 위해 국민학교 졸업하는 것 기다렸다가 졸업하자마자 결혼 시켜버렸다. 그 때 내 친구 나이 열네살이었다. 나도 정신대에 가기 적령기이던 그 때 시시각각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들려오는데 아직 어린 우리들의 앞길이 전혀 가늠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끝없는 어두운 흑암속 같았다. 마침 의학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신대 안가도 된다는 소문에 나는 그 길로 가기로 작정하고 한눈 팔지않고 RN 간호사(registered nurse), 그 한길만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군인들의 군속으로 남양 어떤 섬에 정신대로 끌려 갈 판국이었다.
우리들의 인권이나 생명을 보호받을 힘은 그 지구상에서는 아무 데도 없었다.
또 들리는 다른 소식에 군속으로 끌려가던 아가씨들이 탄 일본군함이 미국 B29 폭격기 폭탄에 맞아 태평양 바다에 침몰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 뉴스를 듣자 마치 내가 폭탄 맞은 것 같이 공포에 떨었다. 내 선배 친구 하나는 집이 너무 가난해 군속으로 나가 부모님들에게 허기라도 면해드리는 효도한번 해보고자 정신대에 갔다는 소문이 나 돌았다. 그 소식 듣자 내 마음 무너지는 것 같이 슬펐다. 정신대에 가서 무슨 일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 아무도 없었지만 무섭고 불안했다.
나는 국비생으로 국립 간호학교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2년은 학술공부, 2년 실습 끝나면 면허증 가진 간호사가 되었다. 소원이던 산파 시험에 합격하여 산파가 되었다. 산파가 되면 정신대 안가도 되고 산원을 개업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해서 그때 인기가 있었다.
정신대에 끌려 간 내 친구들은 군속으로 가면 배고픔을 면하고 뒤에 남은 식구들에게 풍부한 식량배급 준다는데 속아서(오랜 전쟁은 배고픔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간 것이지, 지금 일본정부가 억지로 주장하는 창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