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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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펄베다 대위 최초 LA정착 일지 작성

2012-08-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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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이야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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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LA 정착민을 호위했던 세펄베다 대위의 일지는 LA 도착에 관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소노라의 로스알라모 마을에서 출발, 멕시칼리를 경유하여 높은 산맥을 넘고 넓은 사막을 지나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7개월이라는 긴여행 끝에 1781년 8월18일 우리는 샌개브리엘 미션(San Gabriel Mission)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행 도중 천연두에 전염이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곳에서 제법 긴 시간 격리 수용되기도 했었다. 그 후 격리실에서 풀려난 우리 일행은 로스앤젤레스 강을 향하여 더위와 먼지와 싸워가며 강행군을 지속, 마침내 9월 4일 로스앤젤레스의 동쪽 강둑에 도착하였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강기슭을 따라 지친 발걸음을 옮기다 발견한 얕은 곳을 택하여 우리 일행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자마자 우리는 12년 전에 로스앤젤레스를 처음으로 발견한 최초의 탐험대가 텐트를 쳤다던 바로 그 자리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고 하루를 지내기로 하였다. 멀리 남쪽 방면의 야산(지금의 로스앤젤레스 시청이 세워진 자리) 위에서 가
브리엘리노 인디언들은 낯선 이방인들이 그들의 당나귀로부터 짐을 푸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세펄베다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호위 부대원들에게 경계를 강화시키고 임시 거처의 이곳 저곳을 시찰하였다.

그동안 아내 마리아는 로스앤젤레스 강에서 물을 길어와 저녁식사를 준비하였고 맏아들 후안 호세가 땔감을 모아 임시로 만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우리의 LA 최초 저녁식사는 콩을 재료로 한 토티야(tortilla)였다.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 아내와 나는 저녁식사 후에 불가에 둘러 앉아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미래를 설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후 세펄베다 집안은 로스앤젤레스의 토박이 집안으로 웨스트LA 지역과 사우스베이 지역 대부분의 목장을 소유하게 됐고, 이들 소유의 목장을 이어주던 길은 ‘세펄베다’란 이름의 길이 되어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아무튼 1781년 9월4일, 22명의 성인과 22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최초의 LA 이주민 12가구는 농업 전문가들로, 그들은 12년 전에 크레스피 신부가 명한대로 마을 이름을‘ 엘 뿌에블로 데 라 레냐 데 로스앤젤레스’ (El Pueblo de la Reyna de los Angeles: 천사들 여왕의 마을)라고 지었다.

1년이 지나면서 최초의 이주 가구는 8가구로 줄어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군인 가족과 새로운 이주자들이 정착하면서 이 지역은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782년에 정착민들은 로스앤젤레스 강의 물줄기를 마을로 끌어들인 수로시설을 개발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풍요로운 농장이 건설되자 인근의 가브리엘리뇨 인디언들이 모여들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도 했다. 농장주들은 이들
에게 식량이나 의류, 혹은 다른 유럽 상품으로 인건비를 대신하여 지불했다고 한다.

그 후 샌디에고와 샌루이스 오비스포 미션이 인디언 부족의 공격을 받았던 때에도 피난민들이 LA로 몰려들어 난민캠프가 조성되면서 LA 의 인구 증가에 한 몫 하기도 했다.



(323)346-7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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