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김정옥 l 순이

2012-03-28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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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순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내 사촌 여동생이다.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오기 전날 오후 짐을 싸고 있는데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내일 들어가는 날이지?” “응” 순간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아뿔사! 이를 어째. 며칠 전 모임중에 순이의 전화를 받고 상황이 이러니 다시 연락하마 하고 끊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넙데데한 얼굴에 눈도 크고 입도 큰 순이는 이름처럼 순둥이에 부끄럼이 많은 아이였다. 말 한마디를 해도 망설임이 길었고 웃을 땐 늘 손으로 큰 입을 가리곤 했었다. 마음이 여리고 눈물도 많아 걸핏하면 닭똥같은 눈물을 뚜두둑 흘리며 줄곳 내 뒤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결혼들을 하고, 서로 떨어져 모르고 지내다가 5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에 사는 순이를 다시 만났었다.

어두웠다. 오랫만에 웃어 내느라 얼굴 근육들이 아파 하는 느낌이었다. 남편과 아이들도 있고 궁색한 살림도 아니건만 우울이 덮히고 자신을 잃은 몸짓으로 자꾸 헛날개짓을 해 대는 모습에 내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나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외진 담벽 아래 혼자 앉아 햇살하고 놀고 있는 아이처럼 누군가로부터 잊혀져도 티가 나지 않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순이와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안부를 묻고 기도를 하고. 그래서인지 순이는 나의 행적을 잘도 알아냈다. 미처 연락을 하지 못했을 때도 어찌 알았는지 내가 나가기만 하면 어디로건 전화가 온다. “언니, 나왔다며?” “응, 순이야!” 순이의 목소리는 끈끈하고 집요하다. “언니, 나 요즘 일 조금씩 해.” 곰팡이 냄새가 가신 목소리에 이젠 작은 웃음까지 베어 있었다. 아, 바람이 불고 햇볕이 드는구나! 순이의 전화를 받고 나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래, 다음에 오면 부산엘 먼저 가야지. 그래서 순이랑 같이 짭쪼롬한 바닷바람을 배가 터지도록 마셔 보리라.

TV화면에 학교 폭력을 없애는 방안을 모색하느라 좌담회가 진행 중인걸 보며 순이의 전화를 끊었다. 왜 저 어린 아이들마저도 누군가 한 사람을 벽 속에 가두어 두고 쪼그라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만족을 느끼려 하는지 모르겠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보다는 나 일 수가 있고 내 사랑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만 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인데. 아픈 손가락이 있으면 그 작은 아픔이 온 몸을 진저리치게 만든다는 걸 모르는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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