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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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샌프란시스코 영유권 주장, 스페인과 분쟁

2012-03-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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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48]

▶ 캘리포니아 이야기⑧

가톨릭교회의 강한 압박과 갈레온 무역상들의 캘리포니아 보급 항만 필요성 주장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탐험금지 조치는 160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17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새로운 압박 요소가 등장하면서 스페인 국왕을 긴장시켰다. 그것은 바로 영국이 샌프란시스코 지역 영토 주장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영국이 주장하는 영토 소유권의 전말은 이랬다.

갈레온 무역을 통해 동양의 보물들이 스페인 제국을 통하여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당시의 미개척지였던 캘리포니아 해안에 해적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 출신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갈레온 상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드레이크는 1577년, 영국을 출발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따라 1578년 브라질에 도착하였고 그 해 8월21일에는 마젤란 해협에 진입, 16일 만에 해협을 통과하여 태평양에 도달하였다. 그는 태평양 근해의 뉴스페인 해안을 다니며 상당량의 금은보화를 스페인 선박으로부터 갈취하기 시작하면서 악명을 높였다.


그는 스페인 선박에 대한 노략질뿐만 아니라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내륙 지역을 근거지로(그 지역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따서 드레이크 항만이라고 부른다) 뉴 알비온이라고 이름 짓고 그 지역을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라고 정했다. 그러면서 드레이크는 그 지역의 인디언인 미워크(Miwoks)족의 환영을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지역에서 한 달 보름을 지냈다.

그 후, 북아메리카에서 대서양으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하지 못하자 드레이크는 1579년 태평양을 가로 질러 필리핀에서 식수를 채운 뒤 인도양을 지나고 아프리카를 돌아서 2년 만에 다시 대서양으로 들어섰다.

1580년 9월26일 드레이크의 ‘The Golden Haind’ 선박은 상당량의 금은보화를 싣고 마침내 영국의 플리스머 항구로 돌아갔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드레이크를 친히 마중했으며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그는 해적 드레이크에서 드레이크 경으로 명칭이 바뀌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1588년 132척의 군함으로 조직된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 아르마다 인벤시블레)를 앞세워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당시 변변한 해군력이 없었던 영국에서는 드레이크를 영국 해군사령관에 임명하였고, 그는 야간 선제 기습작전을 펼쳐 정박 중인 무적함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결국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파견하여 잉글랜드를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드레이크에 패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세계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는 사라지고 영국 해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뉴 알비온 지역을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로 문제 삼으면서 캘리포니아의 영토분쟁 지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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