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의 재림 알리는 사명에 최선”

2011-11-02 (수) 12:00:00
크게 작게
“또 하나의 교계 신문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유일한 신문이 될 것입니다.”
2년의 휴지기를 끝내고 오는 6일 복간 되는 미주복음신문의 전 발행인 장진우 장로의 각오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1975년 북미주 최초의 한인 기독언론으로 태어나 귀한 사명 붙들고 달려왔지만 험난한 길이었다. 신문을 위해 희생한 것들을 따지면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끝내 재정이 너무 어려워 문을 닫게 됐다. 당시의 상황을 장 장로의 부인 장사라 권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마지막 신문을 만들 때 ‘폐간’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데 우연찮게 ‘휴간’이라고 타이핑을 했어요. 아차 했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 보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주의 다시 오심을 매주 알리는 일에 충실했고 지면에 실리지 않은 보람들도 많았다. 세계교역자수련회를 매년 열어 한인 목회자들의 화합을 다졌다. 특히 곽선희 목사가 강사로 왔을 때는 750명이 모였던 기록을 갖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들이 대부분 초청됐다.
‘해외 민족 복음화’의 첨병 역할을 해온 미주복음신문 시작의 계기는 사실 장 장로의 어머니 정정숙 권사가 제공했다. 남북 통일에 대한 비전을 품고 계셨던 정 권사는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복음신문을 발행하고 있었고 서울 중구 쌍림동에 소재한 ‘민족 구국 제단’에서 매주 월요일 100여명의 피난 온 어머니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했다. 초교파적인 모임이었고 각 교단 목사들이 강단을 돌아가며 맡았는데 이 모임을 통해 부흥강사로 널리 알려진 신현균 목사가 배출됐고 조용기 목사도 전도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다.
미국에서도 ‘영적 가업’을 잇자는 뜻으로 복음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가지로 배포되다가 교회와 개인 독자들의 후원을 얻어 점점 확대돼 멀리 캐나다까지 보급됐다. 쌍림동 구국제단의 뒤를 이어 ‘횃불기도모임’이 1979년 1월 생겨났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멀리 펜실베니아에서 장 장로를 만나고 싶다며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해왔다. 무작정 달려갔더니 그 사람은 10만달러를 내놨다. “복음신문을 통해 신앙이 거듭났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장 장로는 믿고 있다.
새롭게 태어난 미주복음신문의 새 발행인은 한국 구미푸른교회의 강경구 목사.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은혜로운 목회를 하고 있는 강 목사가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헌신해줘 고마울 뿐이다.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깜짝 놀랄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새벽을 알리는 일꾼으로 살아온 장 장로 부부가 미주복음신문을 애타게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주는 당부다.
문의 (703)821-0070
<이병한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