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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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병사 조각상… 포성 들리는 듯

2011-10-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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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열의 최전방지역 도보행진

▶ <5> 양구

이름 모를 병사 조각상… 포성 들리는 듯

전쟁의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양구의 전쟁기념관.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쟁기념관 독특한 상징물 발길 붙잡아
멸종위기 산양 보호‘증식 센터’도 눈길


횡단 다섯 째 날이다. 아침밥을 파는 곳이 없다. 마트에서 빵 한 봉지와 김밥 한 줄을 샀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양구군 해안면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산모퉁이 따라 냇물이 휘돌고 물길 따라 길이 굽이친다. 산 첩첩 물 첩첩, 산이 깊어진다. “산다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적막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우리니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새싹 움트는 소리, 꽃잎 벙글어지는 소리....


군인 2명이 트럭에 올라 경계를 서고 있다. 한 명은 제대가 2개월 남고, 다른 한 명은 15개월 남았다고 한다. “복무연한이 21개월이니 두 번째 친구는 입대한지 6개월째라고 대답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하나마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지난 달 입대한 녀석은 “제대 20개월 남았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길가 잔디밭에 앉았다. 제비꽃이 피어있다. 들꽃, 흙이 쏘아 올린 축포다. 가까이 보니 참 예쁘다. 오래보니 사랑스럽다. 사람들은 눈길을 먼 곳에만 둔다. 지뢰 표시가 철조망에 걸려있다.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경고다. 철조망 넘어 싸리꽃이 환하게 웃으며 어서 들어오라고 유혹을 한다. 움터 나오는 연초록 봄 싹들이 보드랍다.

길가에 ‘양구 전쟁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상징물이 독특하다. 입구에 한 병사가 통나무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우의를 입고 지친 듯 앉아 있는 저 병사. 무엇을 저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까. 고향의 어머니를 기리고 있을까,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고 있을까. 아니면 숨져간 전우를 생각하고 있을까.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각품 하나가 나그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기념관에서 한 미국인 젊은이를 만났다. 아담 로빈이라고 했다. 순천에서 초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2년 동안 한국을 잘 구경하고 있으며, 다음 달 고향에 돌아간단다.

전쟁당시의 상황을 잘 만들어 배치해 놓았다. 녹슨 철모, 탄피 등이 진열되어있다. 펀치볼 전투 현장을 묘사해 놓았다. 학도병 전사자 이름이 새겨있다. 경기주, 박기병, 오태환...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분들을 생각한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폭풍 불어 닥쳤다 / 눈보라 휘몰아쳤다 / 그 해 여름 갑자기 / 총성은 심장을 향해 소름끼치게 달려들고 / 포성은 하늘을 가르는 듯 삶의 산하를 할퀴고 지나갔다…”

전쟁은 끝났다. 아니, 잠시 휴전일 뿐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모른다. 그래서 함부로 전쟁을 입에 올린다.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기념관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더덕을 팔고 있다. 칼로 깨끗하게 다듬어 주는데 한 봉지 5,000원이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먹어 보라며 하나 깎아주신다. 상큼하다. 한 봉지 샀다. 아까 만났던 로빈이 신기한 듯 곁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더니 선선히 응한다.


더덕을 한 봉지 더 샀다. 식당에 가져가 먹을 거라고 하니, 할머니가 꼭 김해식당에 가서 먹으란다. 로빈이 소주도 잘 마신다. 한국에 와서 술이 꽤 늘었단다. 더덕을 고추장에 찍어먹기도 한다. 스물여섯 살인데 텍사스가 고향이다. 녀석이 한국 칭찬 일색이다. 길에서 만난 인연들이 참 좋다.

“밭두렁 되살리기 운동은 청정 해안면을 되살리는 첫걸음입니다 - 해안면 밭두렁 살리기 협의회-” 배너가 걸려있다. 옛날 농사지을 때 논두렁 콩심기 운동을 벌였던 기억이 살아난다. 논두렁에 콩을 심어 먹을거리를 더 만들어 내자는 운동이었다.

퇴비를 만드느라 논두렁 풀을 베면서 콩을 베지 않으려고 애썼던 일이 생각난다. 퇴비. 시골 어르신에게 농사 비결을 여쭈어보면, 십중팔구는 거름을 많이 해 넣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거름을 장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 농사꾼은 오줌 한 방울도 허투로 누지 않았다. 용변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자기 집 뒷간에다 풀었다. 피보다 귀한 거름이기에, 그 한 덩이도 아까워했다. 거름이 없으면 나락이 쪼그라들어 “메추리도 쪼아댈 게 없어 울고 간다”했다. 정성을 다해 거름을 만들었다. 농군들은 그렇게 흙을 향해 다짐하며 씨 뿌릴 날을 기다렸다.

나도 새벽에 일어나 풀을 한 망태 베어오거나, 길가 잔디를 삽으로 실어서 한 바작씩 지고 들어왔었다. 논두렁 밭두렁에 풀이 저렇게 수북한데 요즘은 퇴비를 사다 쓴다고 했다. 일손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비를 맞고 감자를 심고 있다. 농기구로 일정한 간격에 구멍을 만들면 감자를 떨구어 주는 작업이다. 처음 보는 농사 방법이다. 남쪽지방에는 집안에서 씨감자 싹을 틔워낸 다음, 그 싹을 잘라내어 호미로 땅을 파서 감자를 심는다. 중년 부부인데 남양주에서 이사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냥 살만하다고 편하게 웃는다.

돌산령 터널 입구에 이르렀다. 2008년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는 돌산령 험한 고갯길을 구불구불 돌아야 했다.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펀치볼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삼밭이 참 많다. 머잖아 이곳이 삼 주산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터널을 지났다. 2,997미터다. 3킬로미터, 10리 가까운 긴 터널이다. 비가 그치질 않는다. 차가 지날 때마다 물장을 튕긴다.

양구군 동면 파출소에 들어갔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의를 입고 들어온 나그네를 친절하게 맞아준다. 따끈한 커피를 대접해 준다. 몸이 좀 풀린다.
이 지역에 특별한 얘기꺼리가 없냐고 물었더니 ‘산양증식센터’를 소개해 준다.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차를 가지고 파출소까지 나오겠단다. 젊은 친구다. 안재용이라고 했다. 함께 올라갔다. 꽤 깊은 산중이다. 비는 그치고 안개가 내리고 있다.

“산양의 요람, 양구 산양증식 복원센터”라고 바위에 새겨있다. 원래 이 근처 산이 높고 험해서 산양이 꽤 많이 서식했었는데 6.25를 거치고 지역이 개발되면서 산양이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렀단다. 뜻 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2002년에 산양을 증식하여 방사할 목적으로 이 산양증식복원센터를 만들었다.

지금도 민통선 안쪽과 월악산에 상당수의 산양이 서식하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숫자는 알 길이 없다. 현재 증식센터에서 기르고 있는 산양은 12마리다. 이 센터는 3만 평방미터 넓이며 다섯 명 직원이 관리하고 있다.

산양들이 멀리 보이는데 눈치만 살피고 있다. 사료를 주니 쭈빗쭈빗 모여든다. 사진 몇 장을 어렵게 찍었다. 안 선생이 산양과 관련된 자료와 책을 선물로 준다.

여관에 들어오니 벌써 어두워졌다. 받은 책이 제법 묵직하다. 짊어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파출소를 떠 올렸다. 순경에게 주소와 송료를 주면서 우송을 부탁하니 선선히 받아준다. 파출소에서 이런 심부름을 맡아주다니, 옛날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오늘도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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