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던 나는,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에 관심이 갔다. 여덟 살 된 딸아이가 낙서할 종이를 찾다 발견한 복사지를 보며 장난스레 웃고 있었던 것이다. 쪼르르 내게 달려와, 기저귀를 찬 아기 그림과 비녀를 꽂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다며 또 한차례 웃는다. 그 종이는 얼마 전 한국어 수업에서 사용하고 남은 유인물이다. “엄마, 그런데 이거 너무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냐고 물으니 이런 질문은 너무 짓궂은 것 같다면서 이마에 살짝 주름을 만들며 좌우로 고개를 살살 흔든다.
나는 이런 비슷한 반응을 수업 시간에 한 학생에게서도 본 기억이 있다. 이 학생은 영어 교사 출신의 예순을 넘기신 출판사를 경영하는 분이다. 한국 출판사와 작업하는 일이 있어 우리말을 배우고 계신다. 나누어 받은 유인물을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살짝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살살 흔드셨다.
“몇 살이에요?”
무엇을 셀 때 사용하는 ‘하나, 둘, 셋, 넷……’을 배우는 시간이 되면, 나이를 묻는 이 표현도 함께 배운다.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나이를 묻는 이 표현이 그 학생에게는 영 이상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국어에서 상대방의 나이는 중요한 부분이며, 나이에 따라 존대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 소개했다. 수업을 마치고, 그 학생은 내게 나이가 존대의 기준이 되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귀갓길에 나는 문뜩 ‘나이가 많다는 것이 정말 존대를 받아야 할 이유일까?’ 하는 의문이 마음 속에 찾아 들었다. 자신이 지나보지 못한 시간, 상대방이 나보다 먼저 살아온 삶과 그 시간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삶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과 지혜를 귀히 여기는 문화가 그런 표현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우리말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존칭어를 통해, 겸손하고 정중하게 표현하는 언어임을 새삼 깨닫는다.
예순을 넘겨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신 할머니 학생도, 이제 곧 아홉 살이 되는 딸아이도 늘어가는 한국어 실력과 함께, 표현 하나에도 배려와 겸손함이 담겨있는 아름다운 한국어의 매력을 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ICC 한국어 강사)